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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욱 더 (살전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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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일생의 영원한 표어는 "더욱 더 "라는 것입니다. 이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주를 더욱 더 알아야 합니다. 주를 안다고 하는 일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나다나엘은 빌립으로부터 예수를 소개받고도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인물이 태어나겠느냐고 주님을 능멸하였으며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주님으로부터 수학하고도 십자가의 예고를 들었을 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님을 만류하였으며 열두 제자들도 최후의 성만찬 자리에서 먼저 누가 더 크냐는 시샘으로 심기가 상해 있었으며 엠마오의 두 제자는 주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그 소식을 듣고도 깊은 회의에 빠진 채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자신과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주님과는 너무 거리가 멀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더욱 더 채워져야 합니다.

2. 주를 더욱 더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주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되 자기 생명보다는 덜 사랑했기 때문이요 가룟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주님을 판 것도 주님을 사랑하되 돈보다는 덜 사랑했기 때문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연보 돈 시험에 든 것도 주님보다 체면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요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것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랑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질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묻고 계십니다(요이 1:15). 모름지기 주께 대한 "덜 사랑"이 주께 대한 "더 사랑"이 되도록 더욱 더 분발해야 합니다.

3. 주께 “더욱 더” 드려야 합니다. 주께 대한 봉헌 행위에 있어서 최저선은 있지만 상한선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드리는 일에 십일조 이하는 안되지만 십일조이상은 얼마든지 좋으며 시간을 드리는 일에 이레 중 하루를 아니 바치면 안되지만 그 이상 더 바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주변에는 봉헌 행위에 있어서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아직도 있음을 봅니다. 첫째는 최저선 이하에서 맴도는 사람이요, 둘째는 최저선에서 거만해하는 사람이요, 세째는 최저선을 넘어 더욱 더 바치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도 이러한 세 가지 사람이 있고, 주일성수에 있어서도 이러한 세 가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덜 바치려는 인색한 마음을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발동시키려는 것은 실로 답답한 일입니다. 이제 새 날을 맞이합니다. 지난 날 부실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에 잘 해 온 사람일지라도 "더욱 더 " 잘해서 새 날로 하여금 향상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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