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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 노동관 (살후 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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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이유로 하여 노동을 피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이유로 일을 중단하고 생업에 게을리 하여 비난받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설령 주님께서 내일 재림하신다고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은 성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님께 가납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노동을 천시하여 일을 기피하는 것은 비성서적입니다. 하나님은 노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하시었습니다. 이방 종교의 신들이 하나같이 귀족적인 신들임에 반하여 우리 하나님은 처음부터 천지를 창조하시는, 즉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창 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그리하셨습니다. 그는 나이 30세가 되실 때까지 나사렛의 한 목공장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동을 하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베드로와 몇 사람은 어부였으며 바울은 장막 제조업자이었습니다. 사람은 한량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일군으로 창조된 것입니다(창 1:28).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일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레 중 하루를 안식일로 지키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엿새를 열심히 일하지 않고 주님 이름으로 은혜 받는다 하고 육신의 일을 게을리 함도 역시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노동을 천시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잘못된 문화 배경의 영향 때문이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근거대로 한다면 도리어 노동은 신성시 되어야 마땅합니다. 허욕 때문에 노동을 기피 하는 것도 비성서적입니다. 허욕이 있는 자는 작은 일을 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낮은 데서 출발하려 하지 않고 높은 자리부터 탐하며 심으려고 하지 않고 거두려고만 애씁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으니 궁색하고 생활이 궁색하니 빚을 져야 하고 빚을 못 갚으니 신용이 없고 신용이 없으니 친구가 없고 친구가 없으니 고독하고 고독하게 되니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하며 교회를 원망하고 사회를 저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사회의 문제인이 되고 맙니다. 노동을 경시함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기독교인이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두 가지 필수 과목은 첫째는 성경이요, 둘째는 노동입니다. 일하여 잘 살고, 말씀을 배워 옳게 살면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 확보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바이나 일하는 자에게만 확보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 노동은 인간의 천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일은 우리 육체와 건강 발육에도 좋습니다. 일하지 아니하면 육채가 잘 발육될 수 없고 건강이 증진될 수 없을 것입니다.

(1) 일은 심리적 건강에도 유익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심리는 건전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일을 시키는 직업 요법도 있습니다. 일을 하여야 사람의 마음이 건전해집니다. 일하지 않는데서 병들기 쉽고 일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의심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2) 일은 도덕적 생활에도 유익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건전한 도덕적 생활을 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할 것이 없으니까 극장에도 가고 화투도 하게 되고 댄스홀에도 가게 되고 말장이 노릇도 하게 됩니다. 분주한 사람은 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한가하고 부유한 자가 세상의 유혹에 빠져 가정을 파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에 산 안셀모(Ban Anaelmo) 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기후가 일년을 지속합니다. 숲이 우거지고 꽃이 많고 경치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긴 꽃이 많고 하니까 여기에 꿀벌을 놓으면 맡은 꿀을 얻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 꿀 벌통을 거기에 갖다 놓았습니다. 갖다 놓으니까 처음 몇 달 동안은 벌들이 꿀을 잘 만듭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꿀을 만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저 사방에 꽃이요 언제나 벌들이 청밀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니까 꿀을 갖다 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꿀벌들이 할 일이 없으니까 꽃에서 꿀을 먹고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대로 쏘아주어서 큰 변이 났었다고 합니다. 일이 없는 사람은 이런 꿀벌과 비슷해서 공연히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해칩니다. 일은 도덕적 생활에도 필요합니다. 일하는 가운데 만족을 얻고 내적인 능력을 다시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가운데 향상이 있고 발전이 있고 새 문화가 창조됩니다.

2. 모든 일은 신성합니다. 세상의 일은 모두가 다 필요하니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일은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시대에서나 정신적 노동은 존경했었지만 육체적 노동은 천시를 받아 왔습니다. 우리 동양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서양 사회에서도 그것은 일반화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지혜가 많다고 하는 Platon과 같은 유명한 철학자, 로마의 유명한 대학자인 Cicero 같은 사람도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들이나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적 노동도 정신적 노동처럼 귀하다는 사상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막 6:2에 많은 사람이 예수의 교훈을 듣고 놀라서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장막 짓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중세 시대의 수도원 제도를 보면 수도사들이 깊은 산에 들어가서 그저 성경만 보고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옷감을 짜고 자기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작 자급 했습니다. 기도하며 노동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모든 노동은 똑같이 신성하다 하는 그 사상은 기독교의 유산입니다.

3.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 성 경의 교훈입니다. 고전 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일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골 3 1 22-23에는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 입 다.

4. 일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본문은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가 주의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밤이 오게 되면 아무도 일할 수가 없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옵니다. 환난의 밤이 오고 질병의 밤이 오고 노약의 밤이 오고 죽음의 밤이 옵니다. 밤이 오게 되면 아무리 일하려고 애를 써도 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주실 때에 우리는 주를 위해서 일해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없다." 주님은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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