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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의 확실성 (딤후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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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 경제학 교수인 존 칼브레이트가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을 쓴 이래로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급격히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하여도 서로 적이었는데 지금은 우방이 되어 서로 교역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중공과 미국입니다. 그들은 서로 적국이었지만 그들의 필요와 이익 관계에 따라 서로 화해하고 외교를 개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곧 선진국 수준에 이를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지만 최근에 불어 닥친 석유파동과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우리 경제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계는 급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전혀 예측하지도 못한 질병이 발견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도대체 내일을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사회 속에서 살게 되며, 현실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심령 속에 이 불안을 이길 수 있도록 위로와 평강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비록 불확실하게 급변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의 앞날은 낙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확실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서 언제나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어둠 속에서 강도가 와서 해하려고 해도 주님은 지켜 주십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암흑의 대륙인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 리빙스톤은 "내가 너와 함께 끝 날까지 있겠다"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굳게 믿고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아프리카 지역에 복음을 들고 갔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불변하시며, 언제나 함께 해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토록 담담하게 자기의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다면 우리들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좋습니다. 비록 내일 죽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죽음이나 삶이 동일하기 때 문입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늘에 계신 주님의 영광을 보고는 천사의 얼굴과 같이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기타 모든 순교자들도 이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신앙의 확실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는 구원의 확실성을 가져야 합니다. 12절 본문 말씀에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가진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요 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하였듯이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뿐 아니라 가장 분명한 생의 확실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마음의 의심과 회의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 중에서 간혹 환경에 따라 마음이 약해져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들의 믿음이 사탄의 유혹으로 약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 쳐야만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에게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신하게 되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 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B.C와 A.D의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B.C의 시대였지만 예수를 마음속에 영접한 다음부터는 A.D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남으로 해서 만나기 전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후 5:1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려고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사도 바울의 인격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경험을 하기 전에는 불안과 분노와 질투가 들끓는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항상 감사와 기쁨과 찬양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180도 완전히 변화된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죽음을 향하여 달려갔지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에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면서 희망에 찬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풍성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확실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롬 8:28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이 당하는 환난과 역경이 궁극적으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마을에 큰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다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농부가 하나님에게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십니까?"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극도의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농토는 홍수로 인하여 혼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기의 농토에서 누런색을 띤 돌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었지만 큰 홍수로 인하여 흙이 쓸려 내려가 그 밑에 묻혀있던 금광맥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금광맥으로 인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처음 상태는 매우 암담하고 음울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정말 놀랄만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역경의 시초만 바라보지 말고 그 시련을 넘어섰을 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시련과 역경을 참고 끝까지 잘 견뎌내면 어느 때 인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으로 갚아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다만 감사함으로 그에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지키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3. 우리에게는 영생의 확실성이 있습니다. 영생에 관하여 고후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확신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삶으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거기에 들어가고자 언제나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삶 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으라고 하면 믿지 않겠다고 하는 불신자들도 지옥에 가라고 하면 화를 내고 싫어합니다. 그들도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영원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결혼한 지 3년만에 어린 아이를 낳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인이 암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이 아무리 좋은 집과 금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부인은 쓸쓸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남겨둔 채 죽어 화장터의 한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만일 이 부인과 같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끝난다면 종교가 무슨 소용 있으며, 구원 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은 이 세상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기에 종교는 의미가 있고, 구원의 참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세계에 우리의 장막이 세워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할 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길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이 세상에서 보람된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영원이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은 몸은 마치 누에가 집을 짓고 후에 나비가 되어 날아간 뒤 남은 고치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을 절대화시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너무 현실에 집착하다 보면 내세를 등한히 하고, 거기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련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이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요, 영원히 거할 참된 처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안식을 누릴 소망과 구원의 확실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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