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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의 사생환 (딤후 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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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나중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이 나이 많아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오래지 않아 순교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랑하던 제자 디모데에게 권면의 말씀을 남겨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서는 "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노라.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죽음과 삶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행동을 하였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관제를 보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다 제사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제물로 액체를 드릴 때 그것을 전제, 혹은 관제라고 하였습니다. 즉 제단에 부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관제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자기가 장차 당할 죽음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자신의 피를 드리는 관제로 본 것입니다. 물론 그의 생활 전체가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사로 드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일찌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부터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생활을 정리하는 의미로 그의 생명과 피까지도 하나님의 제단에 관제로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롬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했을 뿐 아니라 자기도 친히 그 말씀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삶은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참으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자신을 산 제사로 드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을 매일매일 산 제사로 드리는 생활을 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끝으로 여기거나 절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떠 날 기약이 가까왔구나" 하여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만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떠난다는 말을 델라어로는 「아나루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에는 「멍에를 벗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소나 말이 무거운 짐을 싣고 가기 위하여 멍에를 메다가 짐을 내려놓게 되면 그 멍에도 벗어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자 멍에를 메고 살다가 이제는 그 일을 다 감당 하고나서 그 멍에를 벗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쉬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이 세상의 수고를 벗어놓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죽음을 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살 때에는 우리가 다 멍에를 메고 삽니다. 성도들에게는 고역의 멍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가 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다가 이 세상의 인생 여정을 모두 마치고 나면 그 멍에를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떠난다는 말에는 고랑을 풀어 놓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의 손목에 매여 있는 쇠사슬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멀지 않아 그 사슬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리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 감옥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감옥에다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의 사슬을 속히 풀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우리는 육체적 제약을 경험하게 됩니다. 환경에 따라 제한을 받게 됩니다. 세상의 정욕에 따라 근심과 걱정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살지만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나면 이 세상의 사슬에서 벗어나 하늘나라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성도는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또 떠난다는 말은 장막의 줄을 푼다는 뜻도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살 때에 그들은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머물러 있을 때는 장막의 줄을 잘 매어 놓았다가 이동하게 될 때는 장막의 줄을 풀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장막에 거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장막을 풀거나 맬 필요가 없었습니다. 장막에서 떠나 영원한 처소에 머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떠난 다는 말에는 배의 닻줄을 푼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배가 항구에 머물러 있다가 항해를 하게 되면 닻줄을 풀러야 합니다. 언제나 구속된 상태에서 떠나기 위해서는 풀려나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 육신의 정욕에서, 교만에서 등등 많은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요단강을 건너 가나 안 땅에 이른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여기서 죽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면 ① 하나님께 최후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②세상의 멍에를 벗어놓고 하늘나라에 가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③장막줄을 풀고 영원한 하나님이 계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④ 닻줄을 거두어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이 곧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환경의 변화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청춘을 믿고 죽음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행동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늙어감에 따라 죽음을 의식하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하나의 변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므로 죽음은 하나의 정리와 결단의 순간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저 세상에서 연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말고 언제나 성실한 자세로 믿음의 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아울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다가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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