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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해와 믿음 (히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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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불과 3절밖에 안되는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세계 문명사와 종교사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즉 종교와 인류 문화의 발전단계를 간단하게 설명한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기독교와 같이 일신론이 있는가 하면 다신론이 있고 범신론이 있습니다.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찾아가다가 하나님은 많다고 하는(다신론) 사람도 있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라고 하는(범신론)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여 미신으로 흐르는 자도 있고 광적인 신앙을 가진 자도 있습니다. 사람이 神을 찾는데 이같이 각양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회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 속에 오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인 인간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계시를 통하여 자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가면을 통해서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인간에게 보였습니다. 이것이 자연계시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이 자연에 대한 관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가령 우리 동양인, 특별히 불교에서의 자연관은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오묘한 경지에 이르면 만물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우주만물 안에 있어서 소위 몰아 지경이요, 물건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어서 한 몸이 되어 버린다는 관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의 관념으로는 자연은 우리의 사용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곧 사람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학이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자연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훌륭한 시인의 시나 훌륭하신 분들의 글 을 보면 이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신 것과 깊으신 것을 깨닫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늘의 일월성신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땅 위의 초목강하가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를 두고 지은 이런 시가 있습니다. “중에 나는 새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나무, 여름이면 손과 발을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나무, 겨울이 되면 머리에 흰 눈을 쓰고 조용히 누워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있는 나무.” 이 시는 자연이 얼마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서양과 고금의 훌륭한 시인들의 시가 다 자연을 읊조리는 시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가 학문과 예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자연을 알기 위한 노력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지만 주자학에 격물치지(格物致知)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대함으로 거기에서 인식과 지식이 생기고 또 각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왕양명은 이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뜰의 대나무를 마주보고 닷새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이 생기지 않고 필경 병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면서 양지(良知)를 통해 진리를 터득한다고 했습니다. 양지는 심리학적인 명사로 본능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이 있습니다. 콩을 연구하기 위해서 콩밭에 가서 이레 동안 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철학과 이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같이 자연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코자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만을 통해서 계시한 것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거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여러 선지자, 훌륭한 성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이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서도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 이제는 자기를 찾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물론 이해가 없으면 신앙을 얻지 못합니다. 이해와 신앙에 대한 설명을 좀더 해 봅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온 몸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봉사 하고 이웃 사람을 내 몸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관념은 세 차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생리적인 육체의 나, 심리적인 나 곧 우리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외에 영적 존재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는 지성, 깨닫는 각성, 그리고 우리가 심령으로 깨닫게 하는 힘, 곧 인스피레이숀의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세 가지 중 지성이 지극히 풍성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머리는 좋지 않으나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있습니다. 즉 정서가 깊은 사람들이지요. 또 영적으로 발달되어 은혜에 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근래의 학자들은 지성이 강하여 종교에 대해 이해 안 되는 이야기라 하여 배척합니다. 반면에 정서가 깊은 사람들은 말할 때 감동을 받고 흥취를 가지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서 큰 감화 받고 찬양을 통해 은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광신이라는 위험의 요소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진리를 확인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확인과 신뢰가 전적으로 우리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에 호응해야 됩니다. 이것은 지성과 이해만을 가지고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는 그리스도를 이해해야만 할 뿐 아니라 의지적으로 공감하고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상식을 벗어날 때 광신이 됩니다. 상식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믿음은 마음으로 합니다. 그러나 마음과 머리가 일치될 때 건전한 믿음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순전히 지성으로 해석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영적생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호응하는 가운데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물적 존재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자이신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그렇게 믿을 때 우리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씩 실천해 나갈 때 참 사람으로 인격이 완성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우주관과 인생관이 생기게 됩니다. 영국 런던에 성 바오로 성당이 있습니다. 세계 전쟁을 두 번이나 치루었으나 지금까지 온전하게 서 있습니다. 이 성당을 설립한 설계자는 건축가, 미술가로서 유명한 크리스토퍼 통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명성은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가보면 그의 비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래층 한쪽 구석엔 라틴말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성당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 이를 기념하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이 성당을 쭉 돌아보시오. 성당 그 자체가 기념비이지 다른 것이 기념비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같이 나의 인생관이 서 있을 때 나는 의미가 있는 것이며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비천할지라도 거기에는 의의가 있고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소명을 다시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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