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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의 삶 (히 0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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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를 방문한 한 관광단이 몇 마리의 닭을 넣어둔 닭장에 이르렀습니다. 관광단을 온 시내로 데리고 다니면서 안내하던 안내인이 말하기를 “이 닭들은 아주 특이하고 유명한 자입니다. 이 닭들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던 날 밤에 울었던 바로 그 수탉의 순종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광객들은 아주 크게 감격하였습니다. 관광객들 가운데 한 영국인이 닭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나서 “정말 유명한 종자군”하고 말하였습니다. 한 미국인은 수표책을 찾으면서 “값이 얼마입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아일랜드 사람은 안내인을 향하여 “이 닭들이 알을 낳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관광객들은 사도시대의 계승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시대의 성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당장 나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관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복음의 좋은 소식이 신경성 긴장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제로 어떤 도움이 있는가? 일이 잘 안될 때 불안과 근심을 가지는 나의 나쁜 습관을 고치는데 복음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은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신앙을 갖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과 안식 1절에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이 약속, 참된 약속인 안식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따분한 생활 속에서도 안식의 약속이 허락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창조의 말씀을 알고 계십니다. 제 7일에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일을 멈추시고 쉬셨습니다. 이 안식은 이 세상의 태초부터 인간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허락하신 안식일을 우리가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의 본래적 목적을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적으로 본체와 그림자를 오인하고 있습니다. 한 십대 소녀가 나에게 고백하기를 성찬예식 도중에 어떤 모임에 참가하기 위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소녀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 어떻게 성찬예식 도중에 떠날 수 있었어?”라고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그 성찬식에 참여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벌할까봐서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성찬식에 빠진 이유를 밝혔는데 단지 동창회에 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실체와 그림자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찬예식은 주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비록 성찬예식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징에 불과한 성찬식에 대해 지나치게 세심한 태도였던 것입니다. 신자의 안식이 안식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안식의 생활을 보유할줄 아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의미에 따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자체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안식에 대한 모형은 가나안 땅에서도 보여주었습니다. 8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 하였으리라”고 하였는데 만약 모형으로 충분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 계속하여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9절)라는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가나안도 모형 이상의 것이 아니며 상징 이상의 것이 아니며 그림자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진정한 안식이 무엇입니까? 10절에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예정하신 인간행위의 혁명적인 새 원리가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정입니다. 이 예정을 어김으로 인간은 타락했던 것입니다. 이제 또 이 예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돌아오도록 되었습니다. 이 원리가 우리들의 삶 속에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참된 안식에 속하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전체를 통하여 저자가 갈파하고 있는 명확한 진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이며, 참 사람이 되는데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란 말을 여기에서 또다시 되풀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심어줄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인간에게 다시 심어주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이것이 인간행위에 대한 새로운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재생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할 일을 우리들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에 모든 상황을 맡기고 우리 자신들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여 모든 상황에 대처하며 모든 환경을 뚫고 나가는 일입니다. 그럴 때 참된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2. 믿는 자에게 안식이 남아 있음 4절에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후에 쉬신 것은 이스라엘이 결코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가리킨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제도를 세우시기까지 하셨으니 이 안식은 확실한 것인데 아직 완전히 이루지 못한 것은 앞으로 남아 있음을 말씀합니다. 5-6절에 “다시 거기 저희가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 복된 복음을 먼저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 곧 불신앙으로 인하여 저들이 들어가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8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안식일은 가나안 정복이 아니고 영원한 구원의 복락을 지칭한 것이 확실합니다.

3.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스라엘이 불신앙으로 허락받은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 같이 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하여 믿는 자에게 허락된 천국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10절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하였는데 안식에 들어간 자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성도는 벌써 믿는 그 순간, 지상에서도 구원되었음을 가리켜 안식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그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쉰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일을 쉬심이지 그 후에는 일체 아무 일도 아니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섭리하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은 계속하십니다. 요 5:17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뜻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다 하더라도 천국시민으로써 곧 신자로서의 빛과 소금의 직책을 항상 다하여야 합니다. 1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순종치 않는 자에게 본을 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순종치 아니한 본”이란 이스라엘 광야에서 불신앙으로 멸망한 전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항상 멸망으로 인도합니다(요 3:18). 그러므로 결코 불순종의 본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항상 바른 믿음에 거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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