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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히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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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흔히 창조주 하나님을 피하여 숨으려고 합니다. 또 스스로 숨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먹으면 저주요 불행이요 안 먹으면 행복이 계속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끝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 저들은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되었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고 자신의 수치를 가리워 보려고 했으나 내려 쪼이는 햇볕에 잎사귀는 말라서 부스러져 다시 그 수치가 드러났습니다. 다시 무화과나무를 따서 가려 보았으나 저녁에 다시 그 수치가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허물과 죄를 무화과나무로 가리워 숨겨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으로도 결코 그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이런 인간을 사랑의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나타나지 않고 숨어 버렸듯이 인간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얼굴을 가리고 맙니다. 사람이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잃지 않을 때 그 위엄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자기의 더러움을 나타내기가 떨리고 부끄러워서 스스로 자기 몸을 숨겨 본 것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종교적 의식과 도덕적 의식을 보통 가지고 있어서 범죄를 할 때마다 마음의 가책을 받고 공포심을 갖습니다. 그리하여 법과 사람의 눈을 피하여 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양심이 마비될 대로 마비되어 피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어져 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자기들의 눈을 가지고 남들이 보이지 않으니 남들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죄를 짓습니다. 이미 그들을 제약하는 종교나 도덕의 법이란 아무런 쓸모도 없고 오직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다 정당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제멋대로 사는 방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위에 말한 하나님이 두려워서 떨며 스스로 숨어보려는 사람보다 훨씬 타락하여 떨어진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내가 숨을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소리는 미친 소리다”고 하나님을 거역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끄러워 숨은 사람이나 거역하는 사람이나 모두를 찾고 계십니다. 나무 그늘에 숨든지 음침한 바위틈에 숨든지 우주선을 타고 별나라에 가서 숨든지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살도록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네가 나를 떠나서 살든지 같이 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 가운데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동산에 영접하여 자기 자녀로 삼으시려고 하셨습니다. 방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자기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을 버려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범죄 한 첫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묵묵히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지시고 부르면서 찾아오십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부드러운 음성, 인자한 음성, 살아있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각 개인의 양심을 통해서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이지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통해서 교회와 전도자를 통해서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계속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시며 땅이라도 녹일 강한 음성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람을 불러주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숨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는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말씀대로 “내가 어디로 가서 주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도망하리이까? 만일 내가 하늘에 올라간다 할찌라도 거기 계시고 내 자는 자리를 음부에 펼지라도 또한 거기 계시니 주 앞에는 어두움이 아무것도 가리우지 못하고 밤도 낮과 같이 비취리니 어두움과 빛이 다름이 없나이다”입니다. 사람은 늘 숨고 하나님은 늘 찾으십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민족 어느 사회에나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문 밖에 밤새도록 서계셔서 문을 두드리시며 찬이슬을 맞아 가시면서 문을 두드리시며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등불을 켜서 드신 손은 못 박혔던 손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온 몸에 지니시고, 문을 두드리면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이 인자한 음성도 죄인의 귀에는 그리 달콤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으로 남아 있는 한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은 물론 심판자의 음성이십니다. 인간이 수천 년을 쌓은 상아탑도 인간을 구원시키지 못했고 인간의 어떠한 공적도 인간을 구원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떨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내일로 자주 미루거나 떨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에게 심판주로 임하셔서 채찍으로 우리를 절벽으로 몰아대시는 하나님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랑과 은혜가 크고 넓고 깊으신 분이십니다. 절망의 저 곳에 낙원을 장만하시고 가난한 심령, 상한 심령을 인도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멸망만 있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정의 간격에 다리를 놓아주시고 십자가를 붙드는 영혼에게 절망의 절벽을 넘어 평안과 희락을 안겨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을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새 희망을 주시며 피할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 길은 인간의 의지나 어떤 힘으로써 생각하거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사람의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있거나 측량할 수 있거나 고안해 낼 수 있는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 하신다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길이라면 사람이 이미 자기의 힘으로 해결했거나 앞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수천 년의 인간 역사와 종교나 철학의 역사는 인간의 무력을 증거 해 줍니다. 어느 누가 제 힘으로 하늘에 도달한 자가 있으며 진실 된 의미에서 참 하나님을 찾아 나선 자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사람들이 끝끝내 못한 그 일을 그 무한한 능력으로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즉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를 만나는 유일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을 믿는 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음의 순종으로 경청하고 그를 맞아들이는 길만이 사람들이 살 길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어느 고무공장에서 불이 났습니다. 아래층은 고무공장이요, 이층은 여직공들의 숙소였습니다. 10여명의 직공들이 시골에서 올라와 공장에서 일하고 숙소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곳이 삽시간에 아래층과 이층에 불이 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뛰쳐나와 구경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처녀는 창문을 부수고 뛰어 나왔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부끄러움도 없이 뛰어내려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십 명의 여직공들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스커트, 내의, 옷 등을 찾아 입다가 시간이 지체되어 모두 타 죽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무엇을 주저하시겠습니까? 죄인 된 우리는 벗은 몸 그대로 적나라하게 하나님 앞에 빨리 나오지 않으면 죄의 물결에 휩싸여 죽고 말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농촌 아버지의 재산을 많이 훔쳐 도시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허랑방탕하여 모든 돈을 며칠 안가서 다 써버렸습니다. 돈이 떨어지니 친구도 다 떨어졌습니다. 아무도 그를 돕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굶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고향 아버지에게 글을 써 보냈습니다. “아버지!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이제 결정을 했습니다. 만일에 이 죄인을 용서하신다면 남은 여생을 몸 바쳐 순종하며 일하며 죄를 속죄할 것입니다. 용서하신다면 속죄하여 한평생을 죽도록 효도할 것이니 그 표시로 손수건을 대추 나뭇가지에 달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시고 아직도 저를 죄인으로 여기신다면 손수건을 안 다셔도 됩니다. 0월 0일 불효자식 ××× 올림” 그는 약속한 며칠 후에 기차를 탔습니다. 마음이 착잡합니다. “만일 손수건이 대추나무에 안 걸렸으면 어찌하나”하고 걱정했습니다. 기차는 고향에 거의 다다랐습니다. 그리운 고향,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차창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대추나무에는 손수건이 수백 개 걸려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카시아, 밤나무, 사과나무에도 손수건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가 고향 역에 내려서 보니 백발이 휘날리는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 자식아 벌써 돌아올 것이지 이렇게 고생이 심했구만.” 눈물을 흘리며 반가와 목을 안고 자식 돌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축하연이 벌어지고 온 동네사람이 초대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뜨거운 사랑으로 여러분을 이토록 찾으시고 기다리십니다. 지체 말고 이제 곧 그 발아래 엎드려 꿇어 봅시다. 당신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것이며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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