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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 (히 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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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활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는 오랜 세월동안 인간을 번뇌케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답을 필사적으로 찾게끔 유도했던 문제입니다. 구약성서의 기자도 욥기를 통하여 이 문제의 해답을 주려 했으나 결론으로는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또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에 대한 원인을 묻는 사람들 앞에서 이 사람이 눈먼 것은 자기의 죄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 오직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왜 이 세상에서 불의한 자가 도리어 잘 살고 번영하는 반면에 의롭고 경건한 자가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영원히 우리에게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통한 부르짖음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꾸며놓은 각본 중의 대사로써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이야 말로 심하게 고통당하는 영혼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한 순간에 집약된 무서운 공포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가시관을 쓰신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는 정말 붉은 피였으며 그의 손과 발에 박힌 못은 정말로 살을 뚫고 들어간 쇠못이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정말 실제였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이 가지는 감정이나 정서가 없는 무감동한 상태에 계셨다고 하였으나 이는 분명히 비성서적인 사상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하게 통곡하고 눈물 흘리며 간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창설자인 에디 여사는 고통의 실제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고통이란 실제적인 사실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기독교의 구원관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극히 위험한 사상입니다.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는 오늘의 제단 위에 놓여진 두 촛대 사이에서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극악한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받았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 하셨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실을 의심 없이 믿을 때 우리 인생의 세계관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제로부터 우리가 당하는 비극이나 실망이나 실패와 좌절이 우리를 파멸의 깊은 구덩이로 몰아넣는 대신에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특전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기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또한 명예스럽게 고난을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의 희망과 넘은 문이 우리 앞에 열려서 우리의 전망이 밝고 건강할 때는 고통의 문제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 키이트의 말처럼 “이 세계의 거인적인 고뇌”가 우리를 엄습할 때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원성을 연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도가니를 통해서 인간 정신이 승화되어 거기서 위대한 예술이 탄생되는 예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이 고통의 문제가 희랍인으로 하여금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루스의 유명한 비극들을 산출케 하였으며, 단테로 하여금 신곡을, 밀턴으로 하여금 실락원을, 베에토벤으로 하여금 위대한 심포니를 산출케 하였습니다. 권위 있는 학설에 의하면 세계적인 문호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이나 오셀로나 햄릿 등의 비극은 그가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려서 깊은 절망에서 헤맬 무렵에 쓰여진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과연 고통이라는 체로써 여과하지 않으면 인생의 찬란한 정금을 가려낼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건강과 행복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신앙은 이런 것들을 그 협력자로서 쓸 수는 있으나 그러나 신앙은 이런 것 없이도 활동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푸른 하늘과 잔잔한 바다와 솔솔 부는 미풍의 생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사나운 날씨와 위기와 동란의 날들을 의미합니다. 역경에 홍수가 밀려와서 우리에게 넘칠 때 이 어두운 순간 우리의 영혼은 그 깨어진 마음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신앙은 이 중에도 그 기능을 발휘합니다. 윌리암 펜의 말에 “고통이 없으면 승리도 없고, 가시관이 없으면 보좌도 없으며, 쓴맛이 없으면 영광도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매우 의미가 큰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 작가 김 은국씨가 저작한 순교자(The Martgred)라는 소설이 크게 히트되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 소설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평양에서 국제 연합군이 진주했을 때 황급히 철수하는 공산군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한 12명의 목사들과 이상한 인연으로 목숨을 건진 다른 두 목사에 관한 얘기가 그 원줄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살아남은 두 사람의 목사 중에 하나인 한 목사는 동료 목사들의 불신앙에서 오는 큰 충격으로 인하여 정신이상을 일으켰고 다른 한 목사(신 목사)는 속으로는 불신앙과 좌절에 빠져 있으면서 전란에서 고통당하는 신자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자기도 믿지 않는 말로 고통과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평안을 열심으로 설교하는 일종의 위선자 내지 배교자로써 그려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신 목사란 인물에서 쉽게 탐지할 수 있는 것은 허무와 절망을 심화시키는 현대의 소위 실존주의자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작가는 신 목사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에서 발산하는 그의 본심을 일종의 휴머니티의 정신으로 보려는 것 같습니다. 이 신 목사란 인물은 표면상으로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면서 속으로는 도리어 회의주의자가 되어 끝끝내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우롱하면서 죽어가는 이중인격자의 심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작가는 이 신목사를 가리켜 불신과 고통의 시대에 태어나서 인간애를 죽음으로 증거 한 순교자라고 논평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소설이 문학적으로 잘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 작가가 이 작품 중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위대한 신앙이나 이름 높은 성자들도 흔히는 회의 속에 있고 깊은 의혹으로 그 마음이 번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문제를 느끼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순교자를 너무 빈정거리며 풍자적인 입장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한국 교회에서 “순교자”라는 말을 너무 쉽게 가볍게 흔하게 사용하는 폐단은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우리 한국교회사 100년에 참된 의미에서 순교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선교사들까지도 이 김 은국씨의 “순교자” 작품에 대해서 유감 된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본국에 돌아간 어떤 선교사가 여기에 자극을 받아가지고 사실적인 한국 교회 순교자 전기를 준비 중에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덮어놓고 세상의 권력이나 관헌들과 일부러 충돌을 하여 그들의 분노를 사가지고 빨리 순교를 자취하는 그런 극단적인 열광주의적인 태도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을 본받아서 그의 뒤를 따라 수난의 길을 걷는 참된 제자들의 존재를 누가 부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우리의 종교적인 행위가 크리스찬을 만드는 것 이 아니고 이 세계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만이 진정한 크리스찬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받는 고통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자, 그는 과연 성도라고 불리 울 수 있는 자입니다. 영국의 문학 비평가 웰즈씨가 그의 저서 “보이지 않은 임 금으로써의 하나님” 중에서 하나님은 선량하고 친절한 분이지만 그러나 그는 무력한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전쟁하는 때의 중립국과 같아서 동정할 수는 있으나 참여할 수는 없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흥분하게 하는 축구 경기를 구경하는 구경꾼 내지 방관자와 같은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무능함을 비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슬픔을 아시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근심을 대신 메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틀림없습니다. “너희가 좁은 곳에서 내게 불러 아뢸 때에 내가 너희를 건져내어 넓은 곳에 서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의지할 때만 우리는 모든 구속에서 풀려나와 참으로 자유 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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