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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난 (히 0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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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의 고난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고생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한 토막의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통곡하셨다는 기록이 없는데 여기 본문 말씀은 심히 통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히 5:7에는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상 큰 난제로 되어있는 말씀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7절 상반절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기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눅 22:42에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셨는데 여기 잔이란 고통과 어려움을 의미하며 죽음의 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옮겨달라고 하신 것은 죽음을 면케 해주시기를 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이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이 되지 아니하시고 건짐이 되셨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서에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는 것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로 죽음에서 멸망 받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기원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 죽음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이 아니고 그야말로 영원한 비극을 의미하는 멸망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멸망 받지 않도록 다시 살리셨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그가 죽으셨다가 살아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직을 실행하시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 멸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아셨는데 영원한 죽음에서 구해 주시기를 비는 그런 기도를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기도가 무슨 기도였습니까? 둘째 해석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는 것은 죽을 지경의 그 고민에서 건져 주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마 26:38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일은 벌써부터 각오하신 바이고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줄로 그가 아셨기 때문에 그 죽음을 면케 하여 주시기를 기원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고 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장면이야말로 그 해석의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실 십자가는 너무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을 하루 앞둔 예수님의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에게서 얼마동안이라도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우리 죄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는 것도 잘 모르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그 상태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류 중의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 겟세마네 동산의 고통이 어떠한 내용이란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이 고통을 알려면 지옥에 가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고통을 인하여 낙심 하거나 혹은 그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당하시면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죽을 지경에서 기도하시면서 그 고통을 덮어놓고 면하여 주시기를 구하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신 그 중심은 얼마든지 고통을 감수하시려는 큰 각오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그 모습이야말로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한, 감수하기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 “죽을 지경의 자리에서 기도하신 고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시는 주님의 형편으로 돌아가 봅시다. 주님께서 눅 22:42-44에서와 같이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기도를 마쳤을 때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기도가 끝나자 사자가 왔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이것이 만고에 기도의 오묘를 가르치는 주님의 실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위로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위로를 받으신 주님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4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응답받은 후에도 쉬지 않고 기도하되 더욱 힘써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비결이요 모든 성도들이 지켜야 할 황금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통 응답받은 후에 기도를 그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쉬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만고의 기도의 교훈인줄 압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면서 통곡하여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습니다. 통곡의 기도는 귀한 것입니다. 이 통곡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눈물은 정서( emotion )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정서가 없는 사람은 그 인격에 병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서, 즉 눈물이 없다면 아주 크게 잘못 된 사람이라고 저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왜 눈물이 없겠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받을 때 눈물을 흘립니다.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도 아주 악독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만족스런 사랑을 해줄 것 같으면 사랑에 감격하여 웁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 울고 사랑이 끊어졌을 때도 웁니다. 어린아이는 장난감, 돈, 과자, 인형 모든 것이 있어도 어머니만 떠나면 웁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만 찾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는다면 눈물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신학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끼고 신학만으로는 기도를 못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맛이 어떠하냐의 대 답이 중요합니다. 학문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학문만으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고장이 난 사람은 눈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만인의 저주 죄를 홀로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갈 3:13에 “그리스도께서 우기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 그들이 받아야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짐은 바로 죽음인데 예수님은 이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학문에 몰두하다가 눈물이 말라 버리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학문이 필요하나 그것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눈물이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눈물이 마르면 딱딱한 막대기나 차디찬 돌이나 차디찬 쇠 조각에 불과하니 심히 두렵습니다. 눈물이 있어야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눈물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이요 눈물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말이요, 눈물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없다는 말입니다.

2. 순종의 고난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실 그 고난을 순종함으로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순종을 배웠다는 것은 첫째, 순종의 덕이 어떠함을 생각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순종할 때 더 높은 생명을 얻으며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니 참으로 오묘합니다. 둘째, 어렵고 괴로운 것을 잘 받아야 순종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순종이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니만큼 그것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많은 고통과 역경이 있는 법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오락이나 평안에 근거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이론으로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마치 수영을 배우려면 몸을 물에 담궈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으로 순종을 실행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속죄사업을 이루셨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순종하신 것은 아버지의 계시대로 따라가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순종을 배우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도 주님에게 순종함이 그 바른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때에만 참 사람의 자격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가지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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