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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線) (히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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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8월 29일 대한 적십자 대표단 54명이 평양으로 떠나던 날 그들의 글 중의 처음 몇 줄을 소개합니다. “소련어를 지껄이는 모스크바 사람들도 중국어를 지껄이는 북경인들도 다 왔다 갔다하는 평양이다, 더욱이 요즘에 와서는 영어를 지껄이는 뉴욕 사람들도, 일본말을 지껄이는 동경 사람들도 드나드는 평양이다. 그러나 유독 그 평양에서 지껄이는 말과 같은 말을 하는 서울 사람들만은 갈 수 없는 도시가 평양이다. 그래서 평양은 동경보다 더 멀고, 뉴욕보다도 멀고, 런던보다 더 멀고, 아니 모스크바보다 더 먼 도시가 되었다. 그러니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221km. 그것은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더 가깝고 서울에서 목포까지의 거리보다 더 가깝다. 가깝고도 멀고 멀고도 가까운 도시 평양…….” 녹슬었던 남북사이의 노선이 새로운 만남의 선으로 이어졌던 감격의 아침을 우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오늘! 잠시 동안 열렸던 서울 평양간의 선은 두 도막으로 다시 끊어지고 잠시 동안 오고갔던 희망의 장소는 또다시 욕설과 저주로 나타나게 되어 버렸습니다. 보이는 선, 보이지 않는 선이 끊어진 채로 평양은 또 다시 뉴욕보다 먼 곳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파리를 떠나 목적지인 서울로 돌아오던 KAL기가 선의 혼돈 때문에 추격을 받고 강제 착륙을 당하는 아픈 경험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습니다. 1983년 9월 1일, 뉴욕 발 서울로 향하던 KAL기가 선을 이탈하여 사할린 상공에서 방황하던 중에 소련 기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맞아 격추당했던 일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 사건 후에도 소련과 우리는 아무런 외교적인 선이 없었기에 궐기대회만 몇 번 하다가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새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선은 곧 힘이다.” 이것은 線을 많이 가진 사람은 곧 힘 있는 사람으로 대우 받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학문으로 이어지는 선, 권력으로 이어지는 선, 금력으로 이어지는 선, 기쁨으로 이어지는 선, 기술로 이어지는 선, 이 선들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힘센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은 곧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동분서주하는 우리 삶의 내용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 선을 찾아 헤매는 삶입니다. 성서에도 수많은 線의 얘기가 증거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수많은 선중에서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증거 하는 두 선과 만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아론의 선과 멜기세덱의 선입니다. 아론, 그는 출애굽기 사건에 등장한 제이의 주역이었습니다. 레위족속의 계보를 따라 출생한 아론, 그는 출애굽 사건의 제 일의 주역이었던 모세보다 세 살 위인 형이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모세의 그늘 밑에 깔려 크게 부각되지 못한 아론이기도 합니다. 모세를 따라 바로 궁전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언제나 주역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내산 밑에서 이스라엘을 충동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는 금송아지로 맞섰던 때도 있었습니다. 모세의 여동생이자 여자 예언자인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향한 모반을 꾸몄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아론은 처음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모든 대제사장의 계보는 이 아론의 계보에서만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아론의 선(線)이란 아론의 혈통으로 내려온 대제사장직의 계보를 의미합니다. 혈통의 계보를 따라 한 줄로 흘러 내려온 전통의 줄을 말합니다. 이 계보는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에게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아론의 線 이외에 다른 선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 선을 멜기세덱의 선이라고 불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론의 시대를 훨씬 거꾸로 넘어선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 이름이었습니다. 창세기 14 장에 꼭 한번 나오는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마지막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영접하고 그를 축복해주고, 아브라함의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받은 족보 없는 제사장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계보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알려진 것은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의의 왕”이라는 뜻과 “살렘 왕” 즉 평화를 의미하는 이름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의 선을 혈통으로 그어지는 선이라 한다면 멜기세덱의 선은 혈통 없는 방랑자의 계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론의 선은 보이는 선이지만 멜기세덱의 선은 보이지 않는 선입니다. 아론의 선은 계보와 전통으로 이어지는 선이지만 멜기세덱의 선은 계보도 전통도 없는 단절의 선입니다. 다만 멜기세덱에는 전통도 혈통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의와 평화가 있었습니다. 아론은 오늘의 우리를 대변하는 상징입니다. 전통의 선을 그 어떤 선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우리 문화의 대변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문을 사회의 공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우리 풍토의 대변이 바로 아론의 선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확장, 보이는 것만으로 이어가는 모든 선들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보겠다는 우리의 생각은 바로 아론의 선에서 온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론을 선택함으로 실질상 멜기세덱은 포기했습니다. 이 말은 보이는 전통과 혈통의 선을 삶의 내용으로 선택함으로 우리는 의와 평화의 선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을 포기하고, 아론을 선택한 오늘이기에 외교의 선, 기술의 선이 커 가고는 있지만 그 선속에 있어야 하는 의와 평화의 선은 계속 단절되고만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한국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세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선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여기서 결정적인 분기점 하나를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론의 선을 선택하는 동안 예수는 유독 멜기세덱의 선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문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선, 학문과 권력으로 이어지는 선, 기술로 이어지는 선들을 찾아 나선 동안 예수는 홀 로 외면당한 멜기세덱의 선, 의와 평화의 선을 선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기도는 바로 이 선을 결단하는 기도이셨습니다. 의의 평화! 그것은 혈통이나 계보의 선을 초월하여 있는 “생명의 선” 입니다. 의의 평화! 그것은 4,0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문화를 초월하여 영원과 연결되는 선인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론의 선에서 나온 예수 당시의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의 선을 따라 의와 평화를 선포하시는 예수를 잡아 죽였습니다. 전통이 의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갖가지 선들! 즉 나를 살지게 하고 나의 이상을 풍요하게 하는 선들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유대인들처럼 의와 평화의 선, 멜기세덱의 선을 말살 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의 선, 즉 의와 평화가 패배한 것 같이 보였으나 역전승을 거두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하나님의 평화와 의가 모든 전통과 혈통보다 영원하고 또 우선하다는 하나님의 뜻이 확증이 되었습니다. 300년이란 길고 지루한 초대교회의 박해의 선속에서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AD 312년 이태리와 아프리카의 통치자 막센티우스와의 싸움에 나간 콘스탄틴 로마 황제에게 기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싸움터에 나가는 그 순간 하늘과 언덕 사이에 비치는 빛 속에 “여기 새겨진 징조로 너는 이기리라”라는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징조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이나 기독교의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병력으로 상대편에 비해 반도 안 되었기에 오직 걱정만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그는 이 징조를 보고 확신을 얻어 끝내 승리했습니다. 싸움을 이긴 콘스탄틴은 바로 그 계시가 기독교의 하나님의 계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이 있은 후에 300년간의 기독교 박해를 그치고 교회를 국교로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세계 기독교 선교 확장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틴 뒤에는 숨어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은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였습니다. 헬레나는 영국왕의 딸로서 로마황제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이혼을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 콘스탄틴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 주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싹이 터서 콘스탄틴에게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헬레나가 심어 놓았던 멜기세덱의 선! 하나님의 기적과 함께 황제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평화를 가지고 통치할 수 있는 황제! 그것은 권력만 가지고 칼을 휘두르던 강포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이라는 선속에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선이 들어옴으로 그 권력과 그 정치는 결국 로마와 자신을 구원하는 새로운 역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삶 속에 모신다는 말은 나는 하나님의 의와 평화에 사로잡혀 그것을 나의 모든 선들 속에서 심어가려는 하나님 앞에 서의 나의 결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평화를 심어가는 정치, 경제, 가문, 학교, 기술, 출세가 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내일을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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