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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본질 (히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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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때에 어떤 제후왕이 자랑삼아 공자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내 백성 중에 매우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남이 기르는 양을 훔쳐온 것을 관청에 가서 고발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공자는 “내가 정직하다고 보는 정직은 그런 정직이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허물을 가리 우는 것이 정직이다”라고 했습니다. 공자의 말은 결코 협조하여 도적질을 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버지께 간절히 간하든지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양을 돌려놓든지 할 것이요, 관청에 고발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물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말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히 11:1을 통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어렵게 정의하였습니다. 믿음은 시간적으로는 미래의 것을 현재의 실상으로 여기는 것이요 공간적으로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심령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즉 미래를 현재화하며 영계의 대상을 육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인 에디슨의 글 가운데 “믿음은 종달새의 앞에서 종달새의 지저귀는 노래를 듣는 것이라”고 한 말은 이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인간의 의식을 지정의로 나눕니다. 가령, 우리가 길을 가다가 꽃나무가 눈에 뛸 때 그것을 무궁화 혹은 벚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지 작용이요, 참 곱다, 향기난다고 느끼는 것은 감정의 작용이며 이 꽃가지를 하나 꺾어 방에 꽂아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입니다. 이런 작용이 내적에서 외적으로 전달되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인격적 활동이 되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진선미로 표시합니다. 진은 지적작용의 목적이요, 미는 정적작용의 목적이요, 선은 의지적작용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는 믿음에 대하여 정의하는데 인격의 요소와 결부시켜 관찰하는 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믿음을 이지적 신앙과 감정적 신앙과 의지적 신앙, 이 모두를 종합한 인격적 신앙으로 생각코자 합니다.

1. 이지적 신앙 근 2,000년간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믿음이 지식보다 앞섰느니 지식이 믿음보다 앞섰느니 믿음과 지식은 서로 합치하느니 피차 배타하느니 혹은 믿음과 지식은 그 영역이 서로 다르다느니 하여 오랫동안 그 문제를 가지고 쟁론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누구의 주장이든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믿음은 지식 이상의 것도 있고 지식 이하의 것도 있고 지식 중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귈 때 처음에는 친구의 소개로 교제하기 시작하면서 믿게 됩니다. 믿는데서 더 알게 되고 아는 중에 전폭적으로 믿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도요한은 하나님과 영교하는 것도 더 깊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동일 시 하였습니다. 요 17:3의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하는 말씀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어느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길손 두 분이 주막집에 마침 함께 한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새도록 부시럭거리면서 저쪽에서 에헴, 이쪽에서 에헴만 하고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상대방을 도적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할 때 서로가 식사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알아보니 목사, 장로였습니다. 저녁에 서로 인사를 나누었더면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인데 서로 도적이 아닌가 의심하여 고생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알아야 믿게 되고 믿어야 알게 됩니다. 믿음에도 아는 것이 있어야 하고 아는데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지는 불신의 죄에 빠지게 하며 불신은 무지의 어리석음에 떨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도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잘 알아야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지적 신앙이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것이 곧 믿음의 한 요소가 된다고 할만 할 것입니다.

2. 감정적 신앙 공자의 수제자 안연은 선생님에 대하여 “쳐다보면 볼수록 더 높아가고 뚫어보면 뚫어 볼수록 더 굳어지는도다, 얼른 보면 앞에 계시다가 다시 보면 뒤에도 계시는구나”하고 찬양했습니다. 또한 자혼의 말을 빌리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높고 넓은 호호탕탕한 하늘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미루어 보건대 공자의 인격적 권위가 그 문인들에게 얼마나 위대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요한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표현하지 않고 예수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 1:14-18의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준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의 고백이며 기독교인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요한이나 우리 기독교인의 가슴 속에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시에 십자가의 그리스도 초상이 있습니다. 이 예술품은 세계적인 작품입니다. 어느 날 어떤 유명한 예술가 한 사람이 가서 구경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보아도, 만든 기교면으로나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별로 신통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목사님에게 자신은 정말 실망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이번에 가서는 무릎을 꿇고 쳐다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가서 무릎을 꿇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때야 과연 예수님의 자애와 권위가 아울러 나타나 그 예술가는 그 앞에 엎드려 그만 감격의 눈물, 회개의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해 나아올 때 무릎을 꿇고 죄를 자복하고 그 위를 쳐다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오만한 마음이나 비평하는 태도로 예수를 믿고 그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바리새 교도가 할 일이요, 결코 기독교인이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신앙의 감정적 요소입니다.

3. 의지적 신앙 우리 인생은 자랄 때는 부모를 의지하고 배울 때는 선생님을 신뢰하고 사업할 때는 친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암만해도 사교적 동물인지라 혼자서 고립하여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 생활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단 일초도 바로 살 수 없습니다. 어떤 가정에는 아내를 의심하고 자식을 의심하며 사는 가정도 있습니다. 불행하다고 생각됩니다. 친구를 의심하며 사회를 의심하며 하나님을 의심하며 성경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도덕상, 종교상으로 큰 죄악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에 밖에 나가 놀다가 아이들이 나를 때린다든지 지나가는 사람이 무섭게 혼내든지 하면 빨리 뛰어 들어오면서 “어머니”하고 불렀습니다. 어머니의 “왜 그러니”라고 하는 음성만 들려오면 그만입니다. 어머니가 안 계셔서 대답이 없으면 정말 무섭고 겁이 났습니다. 어머니도 약하고 병약했으나 어린 내 가슴에는 어머니만 계시면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고 사방에 무일사였습니다. 6 · 25사변 시 총소리, 요란한 피난민 대열 속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들, 편안하고 즐겁게 뛰어 놀면서 피난가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자기와 함께 있으면 주위상황이 어떻든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이변이 일어나고 인간대사가 일어나도 부모가 옆에 있으면 만사가 태평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런 이치를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믿음의 표로 하나님을 더 순종하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의지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4. 인격적 신앙 누가복음 5장에 밤새도록 고기잡지 못한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어선이 물에 잠길 만큼 고기를 가득 잡았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의리도 도덕도 없는 욕심장이었더면 “주여 이제 다른 곳에 가지 마옵소서 이제 내 배에만 계셔서 지시만 하소서 내가 고기를 많이 낚아 주님과 이익을 나누면서 지낼 것입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경건한 사람이라 예수님의 권능을 볼 때 자신의 죄인 됨을 먼저 깨달아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신앙고백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을 가지고 제자가 되기에는 너무 부족하여 3년간이나 따라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아 그 후 제자로써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정의의 통일된 조화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지) 예수를 향해 열렬히 신앙하고(정) 예수의 뒤를 어린아이처럼 따랐습니다(의). 그의 이런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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