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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과 과학 (히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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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의 두 신앙 인류의 역사하는 두 가지 신앙의 형태가 있어 왔습니다. 하나는 과학에 대한 신앙이요 다른 하나는 신에 대한 신앙입니다. 과학이란 현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대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현대과학의 절정을 원자 과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원자 이론은 이미 BC5세기 경에 로이키 포스에 의해 이미 제창되었습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큐레스 등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후에 로마 루크레티우스에게 전달되어 매우 유치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원자의 이론이 계승되어 왔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원자 이론은 더 인정을 받아 오다가 근래에 이르러 프랑스의 가상디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고대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인도교와 불교와 기독교가 그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이밖에 수많은 종교가 인간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현재 관광지를 찾아보면 어떤 종교와도 관련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종교는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현대를 과학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종교시대는 지나갔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나 종교인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현대를 과학시대라 하지만 종교가 필요 없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대립된 것이 아니라 양자 고유의 영역이 있어서 그 분야에서 인류에게 많은 공헌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와 과학은 모순이 아니라 본질을 오해하는 데서 오는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2. 과학적 본질과 기능 과학이란 언제나 가견적인 물체를 연구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형적인 기체, 원자, 전자 같은 것도 연구대상으로 삼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첫째는 실증적이며 논리적이고, 둘째는 모든 것이 실험에 의해서 확증되기 때문에 과학은 그 이상 더 정확을 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학문적 방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전 세계의 모든 연구방법론이 과학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과학의 정보가 정확해지자 과학적 방법론을 기타 학문에도 적용하였다는 것이 주목됩니다. 17세기에 정신과학의 발전에 과학적 방법론이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역사, 철학, 종교, 사회 등 각 분야가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여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과학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해 본 결과 발전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나 하나의 개연성과 통계적 어림에 그치고 말았으며 특히 인문과학에 있어서는 과학적 방법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또한 판명되었습니다. 알란 리차드슨은 말하기를 “과학적 방법이란 말은 한 추상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에만 국한된 분야에 존재한다. 보편적인 과학적 방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과학 등의 특수한 과학적 방법이 있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실험시대라 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과학이 이 분야에 대해 밝힐 수 있는 것은 이 우주에는 과학 이상의 신비가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환자를 치료할 때 똑같은 방식과 재료로써 치료하였는데 어떤 이는 살고 어떤 이는 죽습니다. 그것은 생사가 그 치료 자체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신의 어떤 믿음과 처신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과학은 그의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고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3. 신앙의 본질과 기능 과학은 현재의 것과 물질적인 대상을 분석해 봄으로써 과거의 형성과정과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으나, 미래의 운명까지는 다루지 못합니다. 신앙은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직관이란 사고방법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립니다. 신앙은 절대자인 하나님을 전제로 합니다. 신앙은 형이하학뿐 아니라 형이상학 모두를 포함합니다. 믿음의 대상자인 하나님은 내가 직접 경험하느냐, 경험하지 못하느냐에 그 존재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경험의 영역 속에 끌어넣어 눈으로 보고 만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쏟아 바쳐서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과학적 방법이나 우리의 오관으로 체험할 수 있는 그러한 지식이 아니라 그러한 것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고차원적인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4. 신앙의 창조성 신앙은 새 생활을 발견케 하고 새 창조를 제공합니다. 모세, 아브라함 모두 신앙으로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던 세계를 다 성취한 것입니다. 폴란드의 소설가 센케비치의 단편 중에 “축복이 네게 있으라”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도의 전능의 신, 그리시우나의 일성(一聲)에 의하여 연꽃으로부터 화생한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그리시우나 신에게 “나는 어디서 살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신은 산을 가리켰습니다. 소녀는, 거기는 눈이 쌓이고 추운 고로 싫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수정궁전을 세운 듯한 깊은 호수를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물 속에는 괴물이 있는 고로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무한한 광야를 가리켰습니다. 거기는 선풍(旋風)과 소낙비가 있어서 재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신은 은자(隱者)가 주거하는 동굴을 가리켰습니다. 동굴은 암혹이어서 기미(氣味)가 좋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인도에서 제일 유명한 시인 와루미기가 거문고를 뜯으며 오다가 이 소녀의 미모에 정신이 황홀해서 악기를 떨어뜨렸습니다. 이에 신은 소녀가 살 곳은 저 청년의 가슴이라고 하며 청년을 추천하였습니다. 그 소녀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우아한 청년 시인의 가슴에 안기고자 그 가슴의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던 소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신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오! 신이여. 이렇게 무서운 곳에 살라고 하십니까? 이 청년 시인의 가슴에는 눈이 쌓인 높은 산도, 괴물이 있는 깊은 호수도, 선풍이 부는 광야도, 암흑에 쌓인 동굴도 모두 다 그 곳에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은 엄숙한 얼굴을 한 후 권위 있는 말로 떨어져 인간으로 화한 꽃이여! 시인의 가슴 속에 황량한 눈이 있으면 너는 그것을 녹이는 따뜻한 춘풍이 되어라. 괴물이 있는 심연이 있으면 너는 심연의 진주가 되어라. 광막한 광야가 있으면 너는 거기에 행복의 꽃을 뿌려라. 암흑의 동굴이 있으면 너는 그 암흑을 밝히는 광명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애인의 가슴일찌라도 고산 광야 심연 동굴이 있었습니다. 천태만종의 단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소녀는 자기가 안주할 이상적 처소를 요구 하였으나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상적 남편도, 인상적 아내도 얻기 어렵습니다. 다만 각자 스스로 춘풍이 되고, 미화가 되며, 진주가 되고, 광명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적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5. 신앙의 보존성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의 가치와 의의를 오늘까지 기독교가 보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 있어서도 과거의 의의를 보존한 자가 많습니다. 가령 삼강오륜, 인의예지, 효제충신, 예의염치, 운운하는 동양도덕을 보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좋은 것을 보존하는 힘을 상실하면 퇴화사멸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조금이라도 과거의 좋은 것을 보존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구를 때만 나아갈 수 있고 구르지 아니하면 즉시 거꾸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대학생일찌라도 부잣집 딸에게 장가나 들어서 어름어름 지내게 되면 그 머리는 텅 비게 됩니다. 노인은 매일 조그만 일이라도 하여 부단히 동하지 아니하면 죽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보존하려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존력은 불사의한 생명력 즉 신앙력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로마제국도 야만인이 침입한 이래 정신력이 파괴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로마문화를 보존한 자가 사막에 도입한 수도사들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성

(1)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는 신비(창 1:1) 하나님은 창조의 주인이십니다. 이 우주는 태초라는 시간과 함께 지어졌습니다. 영원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주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무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은 생식 또는 발생과는 다릅니다. 하물며 개조나 진화는 더욱 아닙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진선미의 조화가 있는 현실입니다.

(2) 질서 있는 창조의 신비 1일-빛, 2일-궁창과 물, 3일-육지와 각종 식물, 4일-해와 달 그리고 별, 5-궁창의 새와 물의 물고기 및 각종 동물, 6일-아담과 하와, 7일-안식이라는 일련의 순서로 말씀으로 천지를 지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32회나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불리웠으니 이름 그대로 전능하신 창조주로써 하나님을 칭송하기에 적합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는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광활 무변한 우주의 신비가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진의 세계도 하나같이 신비롭고 질서 정연합니다. 결 론 우리는 과학적 지식에만 의존해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학적 지식이란 우리의 삶의 극히 한 부분만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과학적 지식에만 의존했다가는 기계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뇌 속에 담겨질 지식이란 많다고 해도 얼마 안 됩니다. 인간의 지식은 교만케 만듭니다. 사실 지식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의 생활이란 모래알을 씹는 것 같은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앙 위에 지식이 쌓일 때에는 그 삶은 참되게 되어집니다. 이런 신앙은 삶의 깊이가 있고 높이가 있고 넓이가 있으며 무슨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지는 판단이 매우 건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전제될 때 이성이 다 이해하지 못한 것까지도 이해할 수가 있어서 더 건실하고 건설적인 삶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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