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브라함의 신앙 (히 11:8-10)

첨부 1


믿음의 조상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아브라함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떠했길래 이렇게 우리에게 인상 깊게 있습니까? 오늘은 이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순종하는 믿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 때에 그는 순종함을 보였습니다(8절).

(1)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정든 고향, 부모님이 계신 고향, 이웃과 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을 한번 떠난다 함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계획도 없이, 준비도 없이 정처 없이 떠난다 함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곧 떠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이 우상으로 가득 찬 불의의 땅이었던 까닭에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처럼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이해타산을 먼저 합니다. 가정사정이니, 자녀 형편이니 하여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다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신자, 교역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즉시 응답했던 것입니다.

(2)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데려온 계집 종 하갈을 취하여 평생의 소원인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인간의 정욕과 욕심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약속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 후에 사라 본처를 통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불화와 분쟁이 생기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평화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종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좇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 21:14).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새벽 미명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냉정하게 내쫓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정욕과 욕심으로 인한 불안과 고통은 없습니까? 냉정하게 내쫓아 버리고 용감하게 끊어버리는 것이 참 평안과 행복과 축복의 길입니다.

(3) 이삭을 바치라. 고향을 떠나는 것이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음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세에 귀하게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아브라함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보다 나은 어떤 귀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금보다 은보다 보석보다도 천하보다도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한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에게는 청천 하늘에 벼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사라와 상의도 하지 않고 아무말없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산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인정을 극복하고 불평 없이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2. 미래를 향하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나이 75세에 떠났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안정하고, 평온하고, 향락할 수 있는 고장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우르는 세상에서는 가장 훌륭한 나라의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그의 부친은 그곳에서 상당한 기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안일과 향락의 도시를 떠났습니다. 개척하여야 할 삶의 전반 지대를 향하여 그는 나아간 것입니다. 성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며 장차 분깃으로 받을 장소로 향해 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떠났다.” 번화한 도시의 퇴폐적인 문화를 등지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하여 떠나는 아브라함과 그 추종자들…… 무면한 사막과 벌판을 지나 망망한 하늘 저 편 끝으로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한 연약한 무리……그들에게서 과연 우리는 내일을 믿는 위대한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빛나는 성공이 하루아침에 다 차려놓은 잔치상처럼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수한 시련과 고난이 그를 따랐습니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따르는 자들의 불평도 대단하였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쉽사리 적응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미래에의 희망을 중심으로 자기의 삶을 설계하고 추종자들을 달래어 결속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미래의 세계를 향하여 위대한 행진을 계속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높은 목적이 있었고, 견인불발의 인내와 끈기가 있었으며 생에 대한 적극적인 용기와 열정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안전무결의 인격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결점과 흠이 발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하나의 유용한 일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용감히 부르심에 응한 ale음이었습니다.

3.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삶은 결국 영원한 신의 세계를 사모하는 모습에서 승화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자기가 갈대아 우르나 하란에 남겨두고 온 번영과 안전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세월이 끝날 때까지 장막에 우거하는 집 없는 신세를 지냈고, 그가 죽었을 때에 묻힐 막벨라 동굴밖에 재산을 갖지 못했으니 고향 사람들은 그를 실패자로 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신의 도성,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의 도성은 현상유지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아브라함이 천성을 향해 나가는 신앙이 있었기에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날마다 앞을 향해 믿음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천성은 계시록 21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소망인 하늘나라입니다. 4복음서 중에 “하나님의 나라”란 말이 100번 이상 나오고 예수님의 지상 최초의 설교의 제목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였으며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설교도 나라 일을 말씀하시는 것(행 1:17)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에 있어서 핵심 되는 것입니다. 루터는 천국에 자신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랬기에 그에게 95개항의 항의문을 내걸고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도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귀한 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빛나고 행복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천국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남인지, 북인지 그 방향은 모르나 하나님만 따라가면 천국의 소재를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천국을 별개의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개했습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 22장에서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면서 주님이 계신 곳이 곧 천국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신부는 신랑과 별리한 새 가정을 생각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그는 신랑을 사랑함으로 새 가정이 행복한 것인 줄 압니다. 태양빛이 있으되 십오야 만월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이 있어야 신부가 더 곱게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중심한 천국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천국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갔으며,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중심한 천국을 바라보았고,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지금은 믿음으로 얻은 천국에서 평안히 안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