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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신앙 (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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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 이야기는 대략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늙어서 얻은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은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불 피울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아브라함은 칼을 들고 갑니다. 이삭은 말하기를 “아버지여 하나님 앞에 드릴 번제의 어린양이 어디 있나이까?”하고 자기가 죽을 것도 모르는 소년은 천진하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실 것이다”고 대답하는 아버지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산에 오르자 제단을 쌓고 아들 이삭을 묶어 제물로 삼습니다. 100세에 얻은 이삭은 아브라함 가정의 웃음이요, 행복과 희망을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금보다, 은보다, 보석보다, 천하보다,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 이삭을 바치라 함은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것으로 시험은 끝난 것입니다. 이삭은 물론 죽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대신 바칠 양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신약 성경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해석을 붙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히 11:19). 즉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거역할 수 없다는 피동적인 복종이 아니라 죽어도 새로 지음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앙이 희생의 제물을 가능케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침묵의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있을 수 없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토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인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인 결단은 혈연보다 앞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항변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과 의논하는 주저도 없었습니다. 이삭을 바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신앙은 “침묵의 신앙”이었습니다. 희생의 제물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부딪치는 행동이 있을 뿐입니다. 자연계에도 “희생에 의한 성장”의 원칙이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하여는 썩어 없어진 비료가 필요합니다. 새가 자라기 위하여도 무수한 곤충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아이를 낳고 키워 독립시킬 때까지 부모는 실질적으로 제물이 됩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젖뿐 아니라 피와 땀을 모두 빨아먹고 자랍니다. 서로 모르던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을 때도 행복한 가정이 성립되기 위하여서 피차가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희생이 되려고 할 때 이미 부부 사이에는 틈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부강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강한 미국이 건설되기까지는 피와 땀과 신앙의 수많은 제물이 이 땅 속에 묻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계도, 인간사회도 희생의 제물은 성장과 행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이 “제물의 원칙”을 거역하고, “나만은 제물이 될 수 없소”하고 반역하는 것은 죄입니다. 한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살아나가는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실리주의와 합리주의와 이상주의입니다. 실리주의는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킵니다.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약소민족을 희생의 제물로 삼습니다.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희생의 강요가 자행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괴만 있을 뿐입니다. 합리주의는 개인이 희생되지 않도록 질서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법의 질서를 확립하여 그 위에 가족제도, 사회제도를 만들면 구태여 개인이 희생 안 해도 사회는 잘 되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일종의 낙관주의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법을 악용하는 자들이 나오고, 법을 지배하는 자들이 생기고, 법을 실리주의로 마구 고치는 자들이 나왔기 때문에 지배자에게는 합리적이나, 피지배자에게는 비합리적이고, 가진 자에게는 합리적이나, 못 가진 자에게는 불합리합니다. 계급투쟁과, 혁명과, 경쟁과, 권력의 싸움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상주의는 사랑을 뿌리로 합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 즉 제물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사랑의 질서에서의 고립을 뜻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고독은 사랑의 질서를 거부한 결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상주의의 표본입니다. 그는 스스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새로운 창조”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희생이 희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프랑스……군대……죠세핀”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죠세핀은 이혼한 아내입니다. 자기가 평소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세 개의 낱말을 말한 것입니다. 시인 괴테는 죽을 때 “창문을 열어다오……빛을, 빛을”하고 말했습니다. 시인다운 최후의 말입니다. 베에토벤은 죽을 때 “친구여 박수를……희극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마지막 고백에는 만족이나 완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칠 때까지 자기의 짧은 생애를 유감없이 하나님께 드렸다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끝나봐야 압니다. 자기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끝까지 잘 부딪치고 사랑의 제물로 나 자신과 나의 가장 중요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유한한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나폴레옹의 최후의 말에는 이대로 눈감기 아쉬운 처량함이 있습니다. 괴테의 최후의 말에는 아직도 어둠을 헤매는 방황이 있습니다. 베에토벤의 최후의 말에도 쓸쓸한 허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최후의 말에는 인생을 남김없이 불태운 승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권투선수 모하메드 알리는 자기의 최후의 말을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죽을 때 “농담만 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농담처럼 들리지만 흑인의 인권을 위하여 링 위에서 싸웠다는 제물로써의 사랑이 반짝 빛나는 흐뭇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을 바치는 크라이막스까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설명하는 히브리서 11장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8절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떠났느니라”-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제물의 생애입니다. 9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도 외국 사람처럼 천막에 살았느니라”-평생 정착해 버리는 완전한 저택을 짓지 않고 새로운 개척지를 꿈꾸는 준비의 생활이었습니다. 11절에 “사라는 늙어 단산했지만 믿음으로 임신할 능력을 얻었느니라”-신앙 속에서 축복을 받아 새 시대의 씨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2절에 “이리하여 죽은 자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난 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졌음이니라”-죽음 속에서 희망을 찾는 신앙입니다. 제물 속에 "별의 축복 "이 있습니다. 13절에 “이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 했으나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했습니다”-제물의 생활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일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아브라함의 이러한 신앙을 온전히 닮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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