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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경주 (히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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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에 와서는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신약 성경에 나타날 예수님의 생애를 본보기로 들어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오늘 세상은 경주하는 세상입니다. 능공상 사회 어느 부면에도 태평스러운 곳은 없습니다. 모두 다 바쁨에 쫓기고 있습니다. 생존경쟁이란 참으로 치열한 경주입니다. 사람들은 실리를 위해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에도 유익을 위해 경주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신입 경쟁에 비교될 수 없는 고귀한 유익을 위해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1. 신앙 경주의 준비 경주자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운동 경기자는 무거운 옷을 벗고 간편한 운동복을 입고 나가서 경기를 합니다. 그러면 신앙경주에 있어서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벗어버려야 할 것은 나쁜 습관, 저속한 쾌락, 세속의 오락을 즐기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저속한 문학, 저속한 음악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요즈음 저속한 문학이나 음악의 내용과 가사가 젊은이의 맑은 이성과 품성을 얼마나 흐리게 하고 방탕케 하는지 모릅니다. 여기 본문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정신병 전문가들은 정신이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고 단정하고 정신건강을 위한 중요한 요건으로 타협하는 능력, 중용을 취하는 자세가 정신건강의 비결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서의 입장에서 정신건강은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마음의 평안과 생기를 되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정신건강을 해치고 위협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등감과 자만심입니다. 남에게 푸대접 받을 때, 자기의 지위와 입장이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경우 사람의 마음은 상하기 마련입니다. 자존심이 상하게 되면, 수치감 또는 열등감에 빠집니다. 이 수치와 열등감을 회복하려는 것은 자연적 심리현상입니다. 정신건강을 해치고 위협하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분노와 증오입니다. 상처 입은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노는 원한이 되고, 원한은 쌓여 증오로 변합니다. 거역과 반항과 적개심과 복수심이 다 여기서 발생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에는 욕심이 따르고 폭행이 따릅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다니면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증오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분노와 증오는 신체의 정상적 기능을 방해하여 눈동자가 팽창해지고 근육의 긴장이 오며 심장의 고동은 빨라지고 혈압이 오르고 소화가 안 되며 신경이 예민해 집니다. 분노와 증오는 오물을 버리듯이 훨훨 털어버려야 합니다. 잊어버리고 도외시 해버리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털어버리지 못하면 오물이 썩고 쓰레기에 벌레가 생기면 악취가 풍기고 마침내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할 것입니다.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긴장은 병을 유발시키고, 병은 긴장을 등장시킵니다. 우리는 마음에 대청소를 해야 합니다. 매일 쓸고 닦아야 할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미움의 찌꺼기나, 분노의 오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도록 부지런히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2. 신앙 경주자의 태도 1절에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습니다. 신앙 경주자에게는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침착하여 목적하는 열매를 맺고 마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여기 인내라고 번역된 성서 원어 “후포모네”라는 말은 팔짱끼고 앉아서 무엇이나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든,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죽여 주십시오 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그 어떤 장애에도 의기를 상실치 않는 인내심입니다. 낙심치 아니하는 인내심입니다. 내적으로 낙심되는 일이나, 외적인 핍박을 이기는 인내입니다. 마침내 목표에 도달하는 인내입니다.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인내입니다. 그러나 여기 인내라는 원어 후포모네라는 말은 경쟁의식을 가지고 경주하는 인내를 말함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 남에게 양보하라(5:39-42),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 자기를 낮추라(롬 12:16), 먼저 대접하라, 서로 발을 씻기라(요 13:14)고 했습니다. 경쟁의식은 교만을 조장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며 인본주의로 흐르게 합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남을 높여주며,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남에게 양보하며, 남을 존경하며, 남에게 먼저 대접 할 때에 그 마음에는 기쁨이 있고, 희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무디는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의 은혜는 내려가면서 받는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경주란 말은 경쟁의식을 일으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런 사상은 고전 9:26-27에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와 경쟁한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아볼로와 실력을 겨룬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경주란 말은 애쓴다, 분투한다, 노력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신앙생활에는 방해물이 늘 따릅니다. 무엇이 방해합니까? 자신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인간은 잠시 평안하면 방심하고, 조금 괴로우면 낙심하고, 자기가 잘 되면 교만에 빠지고, 남이 잘 되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인간은 바울처럼 늘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나를 쳐 복종시키고, 내 인격을 통솔하고, 내 마음을 잘 지켜 나가면 신앙생활은 전진합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주님은 어려운 때를 만나도 그의 권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원수에게 쫓기시면서도 천군 천사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붙들려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권능보다는 인내가 미덕이요, 기적보다는 인내가 더 큰 덕입니다. 승리보다도, 정복보다도 더 귀한 것은 인내입니다. 경주자에게는 인내와 함께 최선을 다해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는 이번에 운동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뛰는 것입니다. 99퍼센트가 아닙니다. 100퍼센트입니다.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여서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필요합니다.

3. 신앙 경주자의 목표 2절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목표는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목표는 복잡다양 한 것을 배제합니다. 단순하고 단일해야 목표로써의 가치를 지닙니다. 목표가 여럿이면 마음이 갈리고, 힘이 분산됩니다. 신자의 마음과 뜻과 힘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집중되어야 합니다. 여기 바라본다라는 원어는 “안드로포스”라 하는데 사람도 “안드로포스”라 합니다. 즉 위를 “바라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바라보며 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위를 바라보고 살지 아니하면 참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십자가상의 주님, 부활하시사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만 바라보면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참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실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젊은 미망인이 죽은 남편의 시체를 안고 당신만 혼자 가면 나는 누구를 믿고 살겠느냐고 통곡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남편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남편만 믿고 살면 언젠가는 이 미망인과 같은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죽은 남편도 다 잊어버리고 개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요는 언젠가 한번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고 맙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지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바라볼 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만 바라볼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전망대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는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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