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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고 문제에 대한 대답 (히 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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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모양을 표현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자 곧 울음소리부터 높이는구나. 그 후 모를 일이긴 하나 며칠 웃어 보리라. 나면서 울던 그는 자기 불운의 예언자 였음이여. 눈물이 비운의 증인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가리켜 “눈물의 골짜기요, 한숨의 들판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파세상”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인도말로 고독 또는 고해라는 뜻입니다. 즉 인생은 고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천재지변으로 많은 비참한 광경이 연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해방 후 언제인가 호열자 병으로 한집에 두 사람, 세 사람 장례식을 했던 일도 있습니다. 인생의 비참은 여기저기 있습니다. 인생의 슬픔과 괴로움은 옛부터 그치지 않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괴로움이 오는가 하는 인생고 문제에 관하여 많은 종교가와 철학자들이 해답을 얻고자 힘을 다해 왔던 것입니다. 석가는 자기 설교의 첫째 제목으로 괴로움(苦)을 택했다는 것을 불교경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은 괴롭고 세상은 고해라는 것입니다. 석가는 이 괴로운 세상의 원인을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가기 때문에 괴롭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석가도 여러 가지 기쁨에 대하여 인정했지만 그 기쁨이란 쉬 괴로움으로 변한다고 말했습니다. 빛이 있기에 그늘이 있듯이 기쁨이 있기 때문에 괴롭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 땅의 사물이 기쁨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애착을 붙이게 되지만 애착을 가졌던 그 지상의 기쁨은 유한하므로 그것이 지나가면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 초기 경전 1장에 석가는 비구(比丘)들에게 가르친 교훈 중 네 가지 진리를 알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괴롭다(苦)라는 것이고, 둘째는 괴로움은 집착으로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집(集)이라 하고, 셋째는 괴로움과 집착이 없어져 다한 것이니 이것을 멸(滅)이라 하고, 넷째는 괴로움과 집착을 없애는 길이니 이것을 도(道) 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괴로운 것으로 본 석가는 괴로움이란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근심과 슬픔과 번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것 등으로 모든 인생의 형태를 괴로움으로 보았습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사고”(四苦) 혹은 “팔고”(八苦)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고는 선천적이며 생리적인 것입니다.

(1) 생고(生苦)-삶에 대한 무지가 생고를 가져온다.

(2) 노고(老苦)-사물이 변한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노고가 오고

(3) 병고(病苦)-사람은 병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병고가 오고

(4) 사고(死苦)-모든 만물이 지나간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사고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외의 사고가 있는데 합해서 八苦라 합니다.

(5)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哀別離苦)

(6) 원수를 다시 만나는 괴롬(怨憎會苦) (7) 구하는 사물을 얻지 못하는 괴롬(未不得苦) (8) 오관의 충동(五陰盛苦)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이란 인생관과 바른 우주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지”가 제일 중대한 고인(苦因)인듯 보입니다. 불교의 석가는 이 괴로움이 욕망에서 옴으로 욕망을 소멸하여 자신을 온전히 공허상태로 만들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통을 현실 그대로 괴로운 것으로 보는 동시에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비약을 하는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좋아할 수 없다 할찌라도 적어도 인내로써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의 최대 행복은 자신의 최고 목적을 무엇으로 정하고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에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자기의 인격을 연마하는데 있습니다. 인격 완성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것도 결국 “훌륭하게 연마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인 사회를 만들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인격의 완성”은 인생 최고의 목적이 되기도 하고 따라서 인생 최고의 행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의 목표를 바로 갖고 고통을 받을 때에 비로소 겸손한 마음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괴롭기 때문에 괴롭지 않은 세상을 사모하게 되고, 이 세상이 공평치 못하기 때문에 공평된 세상을 바라게 되고, 이 세상이 불의하기 때문에 의로운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대개 인간이 고통을 당할 때나 실패할 때 가지는 태도는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냉소적인 태도입니다. 둘째는, 체념적인 태도입니다. 모든 힘과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체념에 빠져서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포자기의 태도입니다. 자기를 파괴하고 학대해서 스스로 지옥의 자리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기독교적인 인생의 자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신앙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이 살아온 삶의 배후에는 누구에게나 몇 차례의 실패 경험이 반드시 있는데, 그 경험을 당할 때마다 그들은 자포자기 하지 않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위대한 꿈과 비전과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모든 공경을 변화시켜서 적극적인 삶의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2. 고통의 경험이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때로 성공하거나 번영하거나 지위가 올라갈 때에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교만해지게 됩니다. 교만에 빠져서 자신의 위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만족과 세상 흥미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여 자기 자신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셨습니다. 자아를 상실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숲 그늘에 숨어 있는 아담의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그 명령을 거역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찾고 계십니다. 좌절과 실망의 그늘 속에서 떨고 있는 인간은 그 찾으시는 음성을 듣고 본래적인 자아를 깨닫게 되고, 내가 아닌 곳에 붙잡혔던 나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할찌라도 참된 자아를 찾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도 자아를 상실한 사람보다 더 큰 축복인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 16:26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고통은 가장 귀한 축복을 얻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성장과 번영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미래의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신앙이 참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여읜 소년이 장차 주 법정의 서기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사업을 경영하기 위해서 동업자를 만났는데 그의 배신으로 인하여 그 사업마저 파산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여자를 극히 사랑했으나 그 여자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의원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되고 말았습니다. 국유지 관리국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되었고 부통령 선거에도 실패의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최후에 그는 암살단의 흉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고 하니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이런 실패와 좌절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위대한 축복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1930년 미국의 경제공황시 세계는 공황을 맞아 모든 기업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 당시 예수 라스코라라는 사람은 1929년에 경제공황기를 미리 점치고 자신이 가졌던 모든 증권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빌딩을 건축할 계획을 세워 1929년 기공식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그 건축 공사는 실패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상과는 달리 1931년 그 건축물은 완공되었습니다. 그 건축물이 얼마 전까지 만해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던 102층짜리 템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입니다. 그는 당시에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golder gate를 완성했습니다. 그 거대한 빌딩이나 큰 다리공사는 미국사회가 번영을 자랑하던 화평시기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던 경제공황시기에 건축된 것이라고 볼 때 미국의 오늘날의 성장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위대한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미래를 구원받는 축복의 자리로 인도할 것이며 성공적인 삶의 기쁨을 넘쳐나게 하실 것입니다. 고통과 실패는 오히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 만나게 합니다. 절망은 오히려 믿음을 통하여 참된 진리를 발견하게 합니다. 실패는 오히려 결단을 통하여 새로운 축복의 기회가 되게 합니다. 이 위대한 신앙의 사건과 의미를 기억하시고, 이제는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전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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