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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약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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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가 서신의 체제를 갖춘 것은 본문 1장 1절 뿐이고 전체는 교훈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흩어진 유대인 신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며 그 내용은 흩어진 유대인을 위한 신자의 여러 가지 실제적 문제를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것이 야고보서의 특징입니다.

1. 인사 1절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종,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56절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니냐”라는 말씀처럼 원래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이기는 하나 자신을 예수의 형제라 칭하지 않고 예수의 종이라고 칭하며 신앙 문제와 영적인 관계를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존경의 뜻으로, 노예들이 상전에 대하여 사용된 말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성한 대명사로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라틴어로 ‘주님’은 로마 황제에게 적용되어 그의 신성을 표현했으나 야고보의 경우는 예수를 형이 아니라 자기의 주님인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이란 말은 주님을 대하는 자신의 칭호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노예제도 시대의 입장에서 다시 이해하여야 합니다. 종, 즉 노예가 되는 경우는 첫째, 과중한 부채로 둘째, 전쟁에서 포로가 됨으로 셋째, 노예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노예가 되는 자가 많고 일단 노예가 되면 해방되는 경우는 없고 다만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서야 자유롭게 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여기에 죄의 종으로 고생하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그 값을 지불하여 속죄하였다 함은 죄에서 놓임을 받아 자유를 얻어 그리스도의 소유물, 이제 그리스도의 종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의 칭호에는 적어도 네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1) 절대적 복종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노예에게 있어서 그 주인의 말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법률입니다. 노예는 자신의 권리는 전혀 없고 노예는 주인의 절대적인 소유물입니다. 무조건 절대적인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2) 절대적 겸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니다. 자신의 특권은 전혀 없고 자기의 책임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라 하면 하나님께 대한 봉사 때문에 자신을 버린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는 말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아니요(no)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대한 칭호인 것입니다.

(3) 절대적 충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기의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예에게는 자기의 영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는 것입니다.

(4) 종이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긍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아니고 구약성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들에게 사용한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왕상 8:56, 말 4:4)이었으며 여호수아와 갈렙도 하나님의 종(수 2:8, 민 14:24) 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신 9:27)도 그랬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종 야고보가 본문에서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 유대인에게 문안하노라고 인사했습니다.

2. 흩어져 있는 유대인 이 서신은 흩어져 있는 유대인(디아스포라)에게 보내졌다고 했습니다. 흩어진 유대인(디아스포라)은 원래 성지 이외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을 말한 것입니다. 열두지파가 흩어졌다는 말을 보면 바벨론 포로 이후의 북국 이스라엘이 세계 각지로 분산되고 말았는데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포로로 끌려갔을 때 앗시리아 제국은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켰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 후에는 더욱더 멀리 분산되어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 흩어지고 말았고 그 후 로마시대에 와서 완전히 전 세계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전 세계에 걸친 유대인의 흩어짐은 기독교 전파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유대인이 흩어진 일은 그리스도의 설교자들이 전도할 수 있는 관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흩어진 과정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강제적 이주: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여(BC 721) 앗시리아에 포로로 쫓겨 갔으나 그 열 지파는 후에도 조국에 귀환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강제적 이주: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후(BC 586) 포로로 쫓겨 갔으나 바벨론의 정책은 식민지 민족성 상실을 거부하여, 민족성을 살리도록 하였으며 식민지 백성 중 유능한 인물들을 정계에 등용함으로 사실 바벨론에서도 우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크게 활약을 하였습니다. 사실 유대 학문이 빛을 본 것은 바벨론 포로시대로써 60권 이상의 방대한 유대의 율법 강해서인 바벨론 탈무드가 출판되었습니다. 70년이 지난 후 바벨론 포로인 이스라엘은 귀국령에 의해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귀국하였습니다. 세 번째 강제적 이주:BC 63년에 폼페이가 유대를 점령한 후 많은 유대인을 노예로 삼아 로마로 끌고 갔습니다. 유대인의 강직한 고집과 안식일을 엄수하는 것으로 로마에 간 이스라엘 노예는 거의 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곧 로마에서 가장 번영한 마을을 따로 이루어 많은 로마 사람의 시선을 끌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을 누구보다도 강력히 보호한 황제가 줄리아스 시저 황제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흩어져 살았지만 가는 곳마다 회당을 건립하여 모세의 율법을 좇아 여호와를 경배하고 자기들의 히브리 언어와 풍습을 고수하고 자기네끼리의 결혼을 통해 민족의 순수성을 전승했던 것입니다.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최근 신학계에서는 교회를 표하는 용어로써 엑클레시아와 디아스포라로 사용합니다. 즉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주일이 되면 사방에서 모여 예배하는 모습은 모이는 교회 엑클레시아이며, 예배를 마치고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가는 모양은 흩어지는 교회 곧 디아스포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흩어져나가는 교회는 실향의 민족처럼 고향에 대한 애향심으로 고국을 잊지 않듯이 사회생활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교회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타향의 객지생활 디아스포라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 있는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만은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함께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흩어지는 교회여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흩어져 가는 성도들은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먼저 바른 신앙생활을 견지하며 신자 되기에 앞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 무엇인가 사회에 기여하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흩어지지만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사명을 다한 다음 본향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돌아가기까지는 누구든지 세상의 부귀와 권세, 성공을 얻었다 해도 사실 사람은 처량한 나그네입니다.

3. 서신의 수취인 흩어진 유대인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즉 팔레스틴 밖에 있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참 자손인 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의 계승자가 아니고 아브라함이 행한 것과 같은 신앙의 모범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새로운 이스라엘로써의 교회의 개념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주변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썼으며 또한 새로운 이스라엘 되는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 흩어진 나그네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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