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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면류관 (약 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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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9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라 하였습니다. 곧 비천한 성도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높아진 것을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자랑하는 것은 자기의 비천함을 의식하고 그 받은바 영적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니 이는 교만이 아니고 겸손입니다.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을 겸손히 주님에 의해서만 자랑합니다. 갈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또한 그러하리라”고 했고 빌 3:3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진가를 아는 자는 세상의 다른 진가를 무시합니다. 세상의 고통인 가난, 배고픔, 목마름, 헐벗음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락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2.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10절에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했습니다. 부한 형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전에 자랑하던 재물을 고귀하게 보지 않게 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한 비천을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부귀영화는 꽃과 같이 지나가는 까닭입니다. 부자로서 성도된 자는 다음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딤전 6:17 말씀대로 헛된 재물을 자랑하였으나 이제는 그런 자랑은 버리고 가난한 신자들과 한 반열에 서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 표준대로는 낮아졌으나 실상 영적으로는 높아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습니다. 딤전 6:19 말씀대로 영적으로 높아짐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런 자랑을 품는 자는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만큼 심령에 교만이 없고 도리어 겸손이 있을 뿐입니다. 그가 이렇게 영적으로 잘된 것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재물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자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3. 무상한 세상 11절에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낯익은 사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막에서는 소나기가 한번 지나가면 풀의 가냘픈 싹이 움틉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이 비취게 되면 마치 거기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 같이 그런 풀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이 열풍은 카우손(kauson)이라고 부르는데 이 바람이 사막으로부터 오게 되고 난로 뚜껑을 열 때에 내뿜는 열기와 같이 그 열기가 대단합니다. 한 시간만 불어도 그 열기로 온 초목을 다 태워 버릴 정도입니다. 부유함에 의존하는 인생이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부유함을 의존하는 자는 언제라도 인생의 우연한 일이나 변화에 의하여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는 불확실한 것입니다. 사 40:6-7에서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고 인생을 말합니다. 없어질지도 모르는 불확실하고 상하기 쉽고 멸망하기 쉬운 것을 의지하는 인생이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재산에 그들의 신뢰를 두는 것을 중지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인정하는 새로운 인간성에 영광을 돌릴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딤전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한 것은 돈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4. 생명의 면류관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승리자가 시련을 견딘 공로로 얻음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서만 받되 시련을 통과해서 받도록 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서 많은 고통을 받았고 후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지만 부요한 재산과 열 자녀들이 일시에 패망하고 자신도 중한 병으로 심한 고난에 빠졌습니다. 그때 세 친구는 욥을 공격했고 그 아내도 그를 버렸습니다. 욥은 기가 막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참았을 때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마 5:10에서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한 약속인 것입니다. (l) 고난은 스스로 경계함이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고난이나 환난을 당하면 스스로 낙심하고 한탄하며 남을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지혜 있는 자는 고난을 당하면 자책을 하며 자기를 살피고 회개하여 착한 사람이 됩니다. 가나안에도 사십년 세월에 많은 훈련을 받고 들어갔거든 하물며 천국의 영원한 안식처야 어찌 훈련 없이 들어가겠습니까? 속담에 미운 자식 떡 주고 사랑하는 자식 징계를 더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보다 고난이 많으나 온전히 기쁘게 여김은 이는 천국 후계자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경계하심이니 기쁘게 순종할 것입니다.

(2) 고난은 연단함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일이 크나 적으나 성공하기 바로 앞에서는 넘어가기 어려운 고개가 반드시 있습니다. 중국의 징기스칸의 아들 다마레는 어느 날 전쟁에 패배하여 피난을 하였습니다. 비 오는 날 굴 속에 숨어있는데 한 마리의 개미가 쌀 한 톨을 물고 올라가다가 떨어지고 또 올라가다가 떨어지기를 69회나 하되 낙심하지 않고 70회에 이르러 올라감을 보고 그는 용기를 얻어서 군사를 일으켜 최후의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오는 고난이 실패가 아니요 그 고난의 내면에는 즐거운 평화가 쌓여있고 성공과 승리가 가득하나니 고난은 연단이요 이 연단을 통해서 축복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고난은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합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나 난관에 도달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또 교회가 안락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멀리 떠나나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교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의뢰합니다. 이렇듯 고난은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잠시적인 이 세상의 고난이 먼저 있고 영원한 천국 안락이 후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경영이십니다. 욥이 앞에 오는 갑절의 복을 보지 못함 같이 사람들이 멀리 보지 못하고 목전에 있는 고난만 보는 고로 답답히 여기나 이제 당하는 고난과 장차 오는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들에 굴복하지 마시기틀 바랍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에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음으로 대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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