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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모에 의해 차별하지 말라 (약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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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별 대우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주를 바라보는 자는 곧 내세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이니 그 앞에서는 세상의 영광도 빛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 영광을 소유한 부자를 특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한 것은 사람의 외부적인 빈부귀천에 따라서 차별 대우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영혼을 상품의 가격으로 취급하여 의복이나 그 사람의 소유 정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악한 행위입니다. 차별 대우란 그 사람이 돈이 많다든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권력가나 유명인이란 이유 때문에 그에게 굴복하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바는 이방인도 유대인도 동일한 심판 아래에 있다고 사도 바울은 확신했으며 베드로가 행 10:34에서 깨끗한 동물과 깨끗지 못한 동물을 넣은 보자기의 환상을 본 후에 깨달은 교훈은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특징은 그의 공명정대함이며 그의 공의이며 그의 완전한 공평무사함입니다. 레 19:15에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라고 하였습니다. 신구약성서는 인간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나 또는 사회적 영향력을 부당하게 중요시함으로 야기되는 재판의 불공평과 편파적인 대우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재물이나 명성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2. 교회 내의 속물근성의 위기 2-4절에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집회에 모이는 두 종류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손에 금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부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반지를 빌려서라도 손에 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집회에 우아한 옷을 입고 여러 가지 금 보석 반지를 낀 돈 많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한편 가난한 사람은 달리 입을 옷이 없기 때문에 초라한 옷을 입었으며 보석으로 꾸미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부자는 예의와 대우를 받으면서 특별한 좌석에 안내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서서 있거나 아니면 부유한 사람의 의자 옆에 서있거나 뒷좌석에 앉아 있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여기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 사람의 좌석을 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단하지도 말 것입니다. 앉아있는 대중이 자리를 양보할 것이며 교우들이 서로 따뜻이 맞이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지도자가 돈 많은 사람이 들어왔을 때에 예배를 중지하고 특별좌석을 그 부자에게 마련해 줄 것을 지시하는 것 같은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던 시대였으나 교회만은 신분의 구별이 없이 주인과 노예가 한자리에서 예배드렸습니다. 법적으로는 노예는 사람이 아닌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교회에서는 예배 집례자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들어오거나 부자가 들어올 때 하나님 보다 사람의 신분을 중요시 여겨 예배 도중에 예배가 중단되는 예가 있었으니 야고보는 이 점을 강조하여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더구나 초대교회는 교인 중에 가난하고 천한 사랑이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교회에 들어오면 대소동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특별한 전리품인 양 대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교회 내에서의 완전한 신앙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 유혹들을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완전한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3. 완전한 신앙

(1) 성경 숙고:신앙인으로서 완전한 신앙을 유지함에는 먼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의 유일한 보물입니다. 또 성경은 신앙인들의 등불이 되고 표준이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무한한 사막을 횡단하는 나그네와 같으며 망망한 대양을 항해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러할 때 사막의 나그네는 움직이지 않는 북두칠성으로 표준을 삼아 길을 재촉할 것이요, 항해하는 사람은 나침반으로 그 방향을 찾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우리의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잘못된 예언자들을 보면, 그들은 성경을 이상으로 삼지 않고 자기의 상상력에 이상을 두니 이는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토대로 삼아 한치의 변동도 없이 순전히 믿고 순종하는 그 신앙인 것입니다.

(2) 기도와 묵상:기도는 영적 호흡이라고 합니다. 이는 영적인 투쟁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기도의 심호흡을 하는 사람은 전체에 비해서 극히 소수입니다. 이 사악한 세상을 거룩한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면 그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뼈 속에는 죄악이 못 박혀 있고 우리의 세포에는 죄악이 숨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물건을 보면 탐심이 생기고 낮은 자를 보면 교만해지고 잘난 자를 보면 시기하고 여인을 볼 때는 음욕이 움직이고 모임에서는 허영심이 발동하며 어떤 때는 혈기도 나고 어떤 때는 게으름도 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시각각으로 악마가 우리 마음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어떤 때는 엄연히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나를 붙들어 시험하고 고통으로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은 기도와 묵상이 아니고서는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기도함으로 성령을 힘입어서 다시 소생할 수 있고 마귀로부터 해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완전한 신앙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실행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잘 알고서도 잘못 행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며 기도하면서도 시험에 빠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 중에도 교만한 사람이 많이 있으며 성경을 알면서도 인색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알아도 실행이 없으면 기형아 신앙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실행하지 아니하면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고후 1:19에서 예하면 “예”하고 아니라하면 “아니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허락하시면 그대로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은 성경 그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속에 들어가서 그를 힘입어 살고 있다 하면 이것이 완전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신앙으로 교회에 흠이 없도록 할 것이며 외모로 취하지 말고 주님께서 마 7:1에도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웃을 비판 말고 각각 자기를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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