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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이 없는 믿음 (약 02: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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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에는 산 믿음이 있고 죽은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구원 못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엇에 유익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마 16:26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리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이란 머리의 문제도 입의 문제도 아닌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생활을 뉘우치며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행함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었습니다. 행 19:15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시니이다”라고 마귀가 예수를 시인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승인하였다고 해서 믿음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1. 산 믿음은 행동을 동반한 믿음 임신된 태아가 남아인지 여아인지는 분만할 때 아는 것과 같이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는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그의 믿음이 행동화 되는가 아닌가를 보면 압니다. 14절에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음이요, 그 행실은 남들에게 사랑을 내어줌입니다. 그렇게 될 때 믿음은 산 믿음이 되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의 사상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고전 13:2에서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은 그의 사상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행실이 우리의 구원의 공로는 될 수 없으나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증거품은 됩니다.

2.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15-18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말로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은 많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할 수 없고 물질이어야만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하여 입술로만 평안히 지내라고 부탁하는 것은 도리어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믿음이 죽었다는 말은 죽은 자와 같이 믿음이 아무런 선한 동작을 가지지 못함을 가리킵니다.

3.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1) 산 믿음은 영의 일과 육의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롬 8:5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죽은 것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의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영이 산 증거요 영이 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극서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인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영에 속한 자는 육체 본위의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영에 속한 자는 세상일에 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취한 자는 하나님의 일보다 육의 일을 중히 보고 천국의 소망보다 세상에서 더 재미를 보려 합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이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고도 신령한 것을 분별치 못하여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 광야에서 엎어졌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불순종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산 믿음은 영의 일, 육의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2) 산 믿음은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후에 있어서 선택할 때 단연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것입니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명예냐? 하나님이냐? 출세냐? 하나님이냐?, 이 모든 경우 우리는 단연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전부요 나의 생명이요 나의 구원이요 나의 반석이십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했지만은 그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3) 산 믿음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산 믿음에는 종교적 감화력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의 제사 번제에 이삭을 억지로 데려가서 강압적으로 제물을 삼으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노쇠했고 이삭은 홍안의 소년입니다. 힘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썩은 냄새가 날 뿐이나 산 믿음에는 타인에게 전해 주는 향기가 있는 법입니다.

(4) 행함, 믿음, 양자, 모두 18-19절에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 중 어느 한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 모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균형이 잡힌 사람은 사상과 행동이 반드시 일치합니다. 사상적 인간은 위대한 사상을 고찰하기 위하여 서재에만 앉아 있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과 행동을 반드시 통일시킵니다. 2) 균형이 잡힌 사람은 반드시 기도와 노력이 수반됩니다. 기도가 있는 곳에 의지의 노력이 따르기 마련이고 노력과 기도가 따를 때 일의 성사가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균형이 잡힌 사람에게는 반드시 신앙과 행위가 함께 있습니다. 신앙을 증명하며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위가 시도되며 수행되는 것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질 때에는 행동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균형이 잡힌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는 자는 신앙과 행위를 양자택일이 아니라 언제나 양자 모두를 택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선한 행위에서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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