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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욕의 결과 (약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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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욕이 지배하는 생활의 결과 1-3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1) 기도하며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꼭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마음을 다른데 두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에게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존 녹스는 오전 6시에서 8시까지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생활을 너무 소홀히 하는 죄를 범합니다.

(2) 기도는 정욕대로 말고 하나님 거룩하신 뜻대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인간을 넘어뜨립니다. 정욕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을 부끄러운 행위로 몰고 가며 시기와 질투와 살인까지도 범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정욕이 깃들어 있는 한 언제 파괴적인 행동을 폭발시킬지 모릅니다. 정욕은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어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가슴 속에서 충분히 성숙해 가다가 어느 날 이 상상력이 행동으로 불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범죄는 모두 이 정욕으로부터 생깁니다. 정욕은 처음에는 마음속에 있는 감정에 지나지 않지만 오래도록 양육 받은 다음에는 결국에 가서는 행동에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신자 생활과 세상의 일 4-5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간음하는 여자들이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이 세상주의로 기울어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신랑으로 그 백성은 신부로 보는 구약의 비유에 기준한 말씀입니다(사 54:5, 렘 3:20, 호 9:1).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정조 없는 백성을 향하여 분노하시기를 부정한 아내에 대하여 분노하는 남편같이 하십니다. 이 세상과 벗된 것은 이 세상 쾌락주의로 세상에 애착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정조 없는 행위이니 그런 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분노를 격동시킬 것밖에 없습니다. 몇 해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모 세무서 관청에 취직한 젊은이가 이년 만에 그 자리를 사직하고 중학교 교사로서 시골로 내려간 일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 생활도 충실히 하고 성경도 깊이 보았던 자인데 세무서 관직에 들어가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의 자리는 조금만 지혜롭게 그 직위를 이용하면 상당한 음성적인 수입을 올릴 수가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큰 뜻을 품고 사회에 첫발 디딘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세상 사람은 다들 그 자리를 부러워하는데 그는 삶을 진실하게 충실히 살려 했기에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름과 함께 그는 어려운 시련에 부딪혔습니다. 그의 강직한 성격과 뜻을 관철하다보니 자기 동료들 간에 자신이 소외된 것을 깨달았고 그의 직장에서는 무능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자기 양심과 신앙에 괴로움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직을 그만 두기로 하고 사표를 내고 어느 시골 중학교 교사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크리스찬 젊은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고 했을 때에 그에게는 뜻하지 아니했던 시련이 겹친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양심과 신앙을 떠났다면 그는 그런 고민과 그 좋은 직장도 버렸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 청년의 고민은 그만이 지닌 시련이 아니라 오늘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시련이요 하나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청년의 경우에는 자신의 시련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향한 정조를 지켰지만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버렸는지 모릅니다. 저의 중학 동창생 중에 한 친구는 비상한 재간이 있었습니다. 음악, 운동, 공부, 무엇이나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늘날 서울 광화문 주유소에 기름 파는 서기로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일에 다 재능이 있다보니 어느 한 일도 성공 못한 것 같습니다. 속담에 ‘재간 많은 사람 밥 굶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만 믿고 절대복종 하고 하나님만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다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주로 고백하면서 다른 신을,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위한다면 이는 분명히 계명을 범함이요 간음의 행동입니다. 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비단 육체적 관계에서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박쥐라는 동물은 낮에는 쥐같이 보이지만 밤에는 새같이 보입니다. 교회 오면 교인 같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과 같습니다. 외적인 삶으로는 세상 사람과 성도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만 내적신앙의 삶의 태도와 결단이 다릅니다. 한 기차를 타고 가는 여객 손님은 다 같게 보이나 목적지와 뜻은 다 다른 것과 같습니다. 악한 세상이라 악하게 따라가면서 살면 하나님 앞에 간음죄가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산 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6절의 말씀에 “더욱 큰 은사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물은 낮은 데를 향하여 흐르고 하나님의 은혜는 겸비한 사람들을 향하여 내립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의 첫째 덕도 겸비요 둘째 덕도 겸비요 셋째 덕도 겸비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겸비를 소유해야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1) 교만은 자신의 부족을 모릅니다. 자기 부족을 모르고 자신을 찬양합니다. 2) 교만은 스스로 독립을 고집합니다. 누구의 지시도 명령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지시도 은혜도 거부하려 합니다. 3) 교만은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치 않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 겸손으로 하나님 앞에 점점 가까이 나아가는 특권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 겸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정욕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때입니다. 부디 성도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만을 신앙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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