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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상한 인생 (약 0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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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시인은 글로, 가수는 노래로, 종교인은 설법으로 인생의 허무를 말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떤 곳에서는 인생의 허무를 말하나 또 다른 곳에서는 인생은 가치가 있고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읽어보면 어떤 사람이 어떤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면서 장사를 하여 많은 이익을 보겠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대하여 몇 가지 날카로운 논조를 하였으나 본문에서는 오해를 해서는 안 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장래를 위하여 설계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미래를 위하여 좋은 설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미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문은 “장사하는 것” 그 자체나 “이익을 보려는 것” 그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생활에 경제생활은 필수적이고 수고의 댓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본문 야고보의 교훈은 이런 부정적인 면이 아닌 궁극적인 뜻 깊은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1. 무신론에 대한 경고입니다 13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한 자들아”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 장사하는 자의 마음 태도는 하나님에 관한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의 생각과 생활 속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전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무신론자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신론적인 마음 상태는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무신론에는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이 있습니다. 이론적 무신론은 어떤 이론으로 신을 부정합니다. 실천적 무신론은 이론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을런지는 모르나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그의 생활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도외시하거나 혹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안중무인(眼中無人)이란 말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안중무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을 하지 못할 때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되지 말도록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2. 인간 자체를 너무 믿는데 대한 경고입니다 15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자기의 장래 일을 좌우할 듯이 덤빈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여기 본문 내용은 장사하는 자의 자신이 넘쳐흐르는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너무 과신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상태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하는 일에 너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또 반대로 자기의 힘을 너무 과신하는 것도 불 신앙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색 중 하나가 인간의 힘을 과신하는 과신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기계 문명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다고 믿고 인간의 힘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1) 첫째, 과신은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무서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자들은 모두 과신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로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대량 학살의 범죄를 감행한 것입니다. 과신 병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2) 인간의 과신병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 대한 섭리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보낼 때 다 각자에게 그릇을 주셨습니다. 금 그릇, 은그릇, 구리 그릇, 나무 그릇, 질 그릇 등이 그것입니다. 이에 다 합당한 목적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장군감, 사장감, 장관감, 대통령감, 선생감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뚜렷한 목적을 주시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신병에 들린 자는 이런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를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인생의 무상함을 재인식케 하려는 것입니다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는 것은 인생의 무상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니 그것을 기억하는 자마다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만 신뢰할 만 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변화무상한 인간과 세계는 우리의 눈앞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믿으라”라는 무언의 설교를 그치지 않는 셈입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야고보는 말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원래 감상주의가 아니라 실천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하는 인생의 무상은 철학자들이나 허무주의자가 발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주의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고대 희랍 스토익 학파 중 염세주의자들은 “인생이란 잠간이요 무상하니 결국은 의미가 없다 인생은 절망이야 생을 구하지 말라 생을 부정하라 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동양의 불교에도 많이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이 염세적인 사상, 생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생은 원래 고통인데 그 고통 중 대표가 네 가지로써 生老病死 즉 태어나는 고통, 늙는 것이 고통, 병나는 것이 고통, 죽는 것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약 4:14의 말씀대로 사실 성경도 인생이란 무상하고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생의 이와 같이 무상한 면이 있지만 그 반면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말합니다. 보이는 육신은 안개와 같이 잠간일지 모르나 천하보다 귀한 영혼은 영원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느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느냐? 인간 일생의 운명이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시대에 결정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신의 생활이 잠간이라고 하지만 이 잠간 사는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개와 같이 잠간 살게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하고 사명을 발견해서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는 날은 많지 못합니다. 시 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나의 맡은바 사명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생활이 비록 무상하고 잠간이라고 하지만 주 안에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하는 일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잠간 사는 동안 우리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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