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의 축복 (벧전 04:12-19)

첨부 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원수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신 권면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주기를 간청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하는 반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잔이란 고난의 잔이요, 십자가의 수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실 때 많은 무리가 따랐고 예수께서 이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때 모든 무리가 다 주님 곁을 떠나고 말았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병도 나음 받고 물질의 축복 받는 만사형통의 축복도 있겠으나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져야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믿는 자에게 너희는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고난에 참예하고자 하는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임을 베드로는 강조한 것입니다.

1. 우리는 주님의 육체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탄생하실 때 포근한 침상 비단이불에 싸여 태어나지 못하고 강보에 싸여 불편하고 냄새나는 말구유 안에 누인바 되었습니다. 또한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나시면서 손수 땀 흘려 노동을 하시며 성장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전도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셨으니 주님께선 자신의 생활을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들의 여우도 굴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는 말로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굶주리시고 목마르시며 지치고 피곤한 것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말구유에서의 탄생, 공생애 기간 동안의 힘든 사역, 빌라도 법정에서의 모욕,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의 처형, 이것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중의 마지막 말씀에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은 실로 그의 육체적 고통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 53:5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위하여 얼마나 육체의 고통을 겪었으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까? 바울 선생은 골 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선생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울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우리는 주님의 정신적인, 고난에 동참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정신적으로 받으신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전도생활에는 언제나 제사장, 바리새인 등 많은 적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으셨는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중상모략과 힐난을 받을 때마다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정신적 고통의 절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정신적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마 5:11-12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벧전 4:12-13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만약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거나 또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중상과 모략을 받는 이가 있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으로 시험을 이겨나갈 수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3. 우리는 주님의 영적 고난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밤 깊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의 영혼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하였을 때는 그의 영혼의 고통은 절정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골 4:19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해산하는 고통을 겪는 기도가 있어야 하겠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쳐서 주께 복종시키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며 육체의 소욕을 쳐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장 영광스러운 길은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의 경건한 성도들은 이 고난에 참예키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까지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이제 1세기의 역사를 맞이했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많은 부흥을 가져오게 됨은 그 배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뻐 동참하려는 진실한 성도들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가 적어지면 교회는 차차 열이 식어지고 무기력해지고 기백이 없어지고 나약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적 고난에 참예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시는 교인들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적고난에도 깊이 동참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4. 고난은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는 영생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치 못한 자는 음부의 불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음부는 곧 지옥이니 이 곳은 뜨거우나 벌레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가 주신 갑옷으로 무장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