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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산적 신앙생활 (벧후 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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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말씀대로 무르익은 곡식 중에는 곡간에 들어갈 알곡도 있고 들어가지 못할 쭉정이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성도들 가운데는 천국에 들어갈 사람도 있고 들어가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알곡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기독교인의 8대 미덕이라고 해서 매우 중요시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조건들입니다. 이 8대 미덕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성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5-7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1. 믿음에 덕을 믿음은 우리 기독교인의 생명이요 동력입니다. 즉 큰 공장의 기계장치에서 발전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교회를 위하여 충성할 수도 없고 형제를 사랑할 수도 없고 물질에 대하여 청렴할 수도 없고 천국을 사모하여 십자가를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칭찬을 듣는 것도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교회를 위하여 충성한 사람이 된 것은 그들의 믿음이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까지도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낙타 가죽 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며 외칠 수 있었던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성에서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 할 수 있었던 것도 믿음이 있었던 까닭이요 주 기철 목사, 손 양원 목사가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믿음 위에 덕을 가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믿음과 덕은 기차의 두 선로와 같고 두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날아가는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이며 한 가정의 부부와 같습니다. 믿음이란 체험이요 덕이란 행동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내적인 것이고 덕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덕행이 겸비할 때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과 덕행이 겸비된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 덕에 지식을 신앙과 덕행을 서로 뗄 수 없는 것 같이 역시 덕과 지식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지식은 세상의 지식을 가리킴이 아니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즉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지혜의 눈을 말합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한분 있었습니다. 눈 오는 아침에 자기반 학생들을 3조로 나누어서 대표 한 사람씩을 뽑아 앞세워서 운동장에 데리고 나간 후에 운동장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누가 똑바로 걸어가는지 겨루게 하였습니다. 한 아이는 바로 걷기 위해서 자기 발을 잘 쳐다보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줄이 형편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아이는 공중의 구름을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발걸음이 구름 움직이는 대로 비뚤어졌습니다. 나머지 한 아이는 산 위의 바위를 표준 하여 걸었더니 그 줄이 곧았더라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표준 하여 그 지식으로 살아갈 때 잘못 걷기 쉽습니다. 가리고 정함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때도 유행을 따라 살다보면 생의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이나 어제나 변함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때 그 생은 실패도 없고 낙오도 없고 그르침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쁠 때나 한가할 때나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슬플 때에도, 실망하여 낙심 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쁠 때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면 교만하여 떨어지게 되며 한가할 때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면 타락하게 됩니다. 바쁠 때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면 생명의 주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슬플 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배워야 하고, 괴로울 때 주님을 바라보고 고난에서 의미를 찾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주께 구할 때 금은보배와 지위를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에 지식을 겸비하여 가지는 것은 복 중에 큰 축복입니다.

3. 지식에 절제를 제가 아는 선배 되시는 교수님은 머리도 좋고 인기도 좋은데 어쩌다가 그만 아편주사를 맞았는데 그것이 중독이 되어 아편 없이는 못살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말려도 끊지 못하고 가족이 말려도 아편을 못 끊습니다. 주사를 맞기 위해 집도 팔고 재산도 다 날리고 가족도 버리고 결국은 패가망신하여 객지에서 아편 맞을 돈이 없이 헤매다가 어느 곳에서 죽었는지 모르게 죽고만 것입니다. 지식 있어 무엇 합니까? 지식에 절제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지도자였으나 절제하지 못하여 두 눈을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 아간 같은 사람,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은 모두 절제 없는 생활하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절제는 극기의 생활이니 특별히 젊은 사람에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절제하지 못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절제를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4. 절제에 인내를 절제 생활을 계속하면 인내력이 점점 강해집니다. 인내 없이는 절제생활을 할 수 없으니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한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성공의 대자본입니다. 땀을 흘리면서 인내하지 않고는 성공이 없습니다. 눈물과 피를 흘리지 아니한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인내는 성공의 재료요 인내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져옵니다.

5. 인내에 경건을 인내와 경건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이나 경건한 생활이 없이 절제와 인내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경건성이 없는 인내와 절제는 영적교만으로 고집과 편견에 흘러 은혜를 소멸하는 것이니 경건을 인내 위에 더 가산하여 하나님 앞에 의의 완전한 예복을 입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에 경건을 더욱 힘쓸 것입니다.

6. 경건에 화목을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화목이 없으면 죽은 경건입니다. 형제에게 잘못이 있으면 직접 면책이나 권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집 저집 다니며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키며 온갖 거짓말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달하며, 어찌하든지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드는 사람은 경건하다 하여도 그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7. 형제 화목에 사랑을 사랑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여기에서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만의 사랑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권속만의 사랑을 초월하고 동포의 사랑을 초월하고 혈통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각 방언을 초월하는 것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기능은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일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 여덟 가지의 미덕이 차고 넘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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