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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인의 운명과 의인의 구원 (벧후 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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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절에 “옛 세상을 용서치 않으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 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여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방 전에 만주에는 민가에 방화하고 인명을 살해하는 마적떼가 많이 있어서 치안은 어지럽고 민심은 불안하였습니다. 이때 일본 수비대에서는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적의 목을 잘라서 네거리에 높이 달고 “이 사람 은 어느 동리에 살던 ○○○인데 많은 양민을 살해한 마적임으로 우리 일본 수비대에서는 그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음 앞으로 누구든지 이와 같은 마적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하겠음”이란 경고문을 써 붙였습니다. 그 후부터 마적의 수는 점점 적어져서 만주의 치안은 확립되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왜 소돔 고모라 성을 그렇게도 무참하게 유황불로 멸망시켰겠습니까? 그 이유는 악하고 음란한 자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을 밝혀 보여줌으로써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일간 신문의 사회면을 읽을 때마다 세상이 점점 더 악하여 짐을 알 수 있는데 읽는 사람은 이 사회, 이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세상은 점점 악하여지는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인간의 욕심 때문에 세상은 악하여졌습니다 약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심중에서 태동하는 욕심이 마침내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이 죄악이 인간 세계를 악하게 하고 망치게 합니다. 물욕, 명예욕, 집권 욕, 색욕 등등이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하여 있다가 수시로 발동하여 마침내 세상을 더럽히고 악하게 만듭니다. 감옥에 있는 죄수에게 묻는다면, 살인강도는 그들대로 이유가 있어서 사람을 죽였다는 변명이 있습니다. 모리간신배들은 그들대로 이유가 있고 정치범으로 들어온 자들도 그들대로의 정치 욕, 권세욕에 대한 이유로 법을 어기었다고 합니다. 간통한 자들도 그들대로의 순간적인 색욕 때문이라고 이유를 댈 것입니다. 이같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싹트고 자라난 욕심이 큰 죄를 범하게 하고 이 죄로 인하여 인격은 몰락되고 사회악은 더욱 더 짙어만 갑니다. 은 삼십냥에 눈이 어두워 선생을 판 가룟 유다, 사도를 속이다가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금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군대를 저주하려 했던 탈선한 선지자 발람의 예는 우리에게 주는 좋은 교훈입니다. “돈에 침 뱉는 자 없다”, “금력에 끌리지 않을 자 없다”는 금언도 있지 않습니까? 만원짜리 지폐를 멀리서 보면 돈이 손바닥처럼 작게 보이지만 만원짜리 지폐를 눈 가까이 대어보면 나중에는 돈 만원짜리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황금으로 눈을 가리 우면 체면도 없어지고 의리도 없어지고 하나님의 교회, 성직, 자기의 영혼도 모두 보이지 아니 합니다. 신문의 사회란을 보니 생명보험을 타기 위해서 자기의 시어머니를 집을 방화하여 태워 죽이고 보험을 탔다가 탄로가 나 처벌을 받은 며느리의 비정한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기자는 성도의 올바른 경제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잠 30:8-9의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귀한 경제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어느 시골의 장로님 얘기가 있습니다. 그는 부자로서 전답과 많은 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농촌 교회를 혼자서 부담하여 봉사했습니다. 그러던 분이 나중에 교회 봉사하는 것에 지치고 염증이 나서 모든 가산을 다 정리하여 만주로 이민을 가고 말았습니다. 온 교우가 눈물로 말렸으나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주에 가서 보니 마적떼들이 많고 아편장이들이 많아 돈을 간수하기가 심히 어려웠습니다. 그는 돈 보따리를 염려하여 이곳저곳에 숨기다가 밤이 깊어 결국 마루 밑의 볏 짚단 속에 넣어두고 방에 들어가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그의 부인이 볏 짚단을 아궁이에 넣고 불을 피워 아침밥을 지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장로님이 숨겨둔 돈이 아궁이 속에 재로 있는 것을 보고는 울며 하나님 앞에 자복통회의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 장로님은 항상 교회 봉사에 있어서, 특별히 교회의 핍박 시에 재물로 봉사하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제 한번만 재물을 주시는 기회를 받으면 남은 여생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담배와 비누 군수품의 전매를 허락받아 큰 갑부가 되고 교회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악화되고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제어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사람의 감정 때문에 세상은 악하여집니다 사랑하는 식구가 모여 사는 단란한 가정은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 된 동산입니까? 그러나 식구의 감정이 거칠어질 때는 모두 원수로 보이고 살풍경해집니다. 이런 사소한 감정이 큰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모이는 교회도 사소한 감정으로 의견이 대립되면 친밀하던 교우가 원수가 되고 거룩한 교회 안에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순간적 감정에 사로잡히면 본의 아닌 실언도, 실수도, 범죄도 하게 됩니다. 형제간에 나란히 제단을 쌓고 제사 드리던 가인이 순간적 감정으로 아우 아벨을 죽였던 것은 좋은 예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아들이 둘 있는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아주 정답게 지내는 부부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남편이 약주를 들고 와서 저녁 식사를 하다 밥 속에 있는 작은 돌을 씹게 되었는데 이에 화를 내므로 부부간에 말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소한 일이 큰 싸움이 되어 부인을 발로 차고 매로 쳤습니다. 그 부인은 너무나 화가 나서 울면서 두 아들을 업고는 나가서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세 모자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이 남편도 너무나 기가 막혀 “내 살아서 무엇하리”하며 강물에 빠져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행복했던 가정에 바위도 아닌 돌을 씹었다는 이유로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도 서로 간에 조금만 참고 관용으로 이성으로써 듣고 판단하면 아무 일 없을 것을 소문을 내고 말을 전하여 교회에 큰 문제를 일으켰던 일들이 흔히 있었습니다. 악한 감정은 급성 전염병과 같아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잘 전염되는 것이므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신사가 이른 아침에 우체국에서 30원짜리 우표를 한 장 사고 천원을 주었더니 잔돈이 없다는 사무원의 불친절로 시비가 생겨서 그 신사는 불쾌한 기분으로 우체국에서 나왔습니다. 친구를 만났을 때 그 감정을 친구에게 쏟아버렸습니다. 그 친구는 집에 와서 식사를 하다 화가 나서 그 감정을 아내에게 내뱉었습니다. 그 아내는 맘이 불안하여 가정부를 불러서는 거기다 쏟아버렸고 가정부는 화가 나서 옆에서 밥 먹고 있는 강아지를 차버렸고 강아지는 도망가다 옆의 항아리를 넘어뜨려 깨버렸습니다. 이리해서 그 집은 온통 싸움터입니다. 그러다가 수돗물이 물동이에 넘쳐 물이 길에 쏟아졌습니다.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에 땅이 얼어버렸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음판에 넘어져서 불쾌한 감정들입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불친절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전염병 같은 무서운 감정이 사람의 마음을 휩쓸 때 평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엡 4:27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머리 터지게 싸우다가도 다음날 술 몇 잔에 웃어 버립니다. 우리의 복음은 이방인의 술만 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믿고 잘못 행하는 덜 된 성도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볼 때가 있습니다. 노아는 잣나무로 방주를 지었으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많은 틈이 나있으므로 진으로 안과 밖을 발라서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습니다. 별별 사람이 다 모여서 한 교회를 이룹니다. 성도 사이의 여러 감정의 틈, 사람에 따라 욕심의 틈이 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보혈,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잘 발라서 교회의 신성을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전이 깨끗하고 화평하며 우리도 화평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우리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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