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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것이면서도 새로운 계명 (요일 0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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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에 말씀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 했습니다. 서두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였는데 이것은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요한의 편지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따사로운 감정까지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편지를 읽으면 우리들의 마음이 평화롭고 그의 사랑에 찬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부모들이나 교사, 설교가들이 요한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이 되는 한 가지 계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새 계명은 요 13:34에 있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 계명은 옛 것이면서도 새로운 계명이 됩니까? ①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성서 안에 있다는 뜻에서 옛 계명인 것입니다. 레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청중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예전부터 들어왔기에 이것을 옛 계명이라 했습니다. ② 이 계명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표준과 가치를 주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계명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가 먼저 인간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깨닫기까지는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을 내어 희생하심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셨으므로 사람들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어떤 옛 음악이 훌륭한 지휘자와 연주자를 만나 아름답게 연주되어질 때 전혀 새로운 곡으로 들려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먹던 음식이라도 훌륭한 요리사가 잘 요리할 때 전혀 새로운 맛을 느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은 전혀 새롭게 된 것입니다. 8절에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라” 했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것이며 요한 1서를 받아보는 자들에게도 참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생활방식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췬다고 합니다. 어둠은 미움의 세계이요 참 빛은 사랑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인 미움의 세계가 차차 물러가고 점차로 참 빛인 사랑의 세계가 이를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 편지를 쓰고 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자기들의 생애 중에 이루어질 것으로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재림과 참 빛을 동일시하여 한 인간의 전 존재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때에 그리스도께서 개개인의 마음에 깃들게 되며 만민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따르고 순종할 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사랑으로 통치하실 것으로 생각하여 그 날이 점차로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9절에서 11절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먼저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것은 요한이 인격 관계를 흑과 백이라는 표현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들의 형제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사랑과 미움 중에 한 가지입니다. 그 중간적인 태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사랑의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든지 또는 미움의 어두움 가운데 거하든지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덥지도 차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은 토해내 버리겠다고 하셨듯이 우리의 태도는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한 것은 바다를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이교도들에게 열심으로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바로 이웃에 있는 형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차라리 멀리 있는 자들을 사랑하려 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형제들부터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도 은혜를 끼치게 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도 사랑하게 되어 미혹됨이나 시험 당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하나님과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어 마음속에 참 평안이 있게 되면 영적인 신앙생활도 자연히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거닐며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그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미움과 원한을 품고 있으면 그의 판단력은 둔화됩니다. 따라서 사물의 올바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매사에 악한 생각만을 가지게 되어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생에 있어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처한 위치가 어딘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나 아니면 미움과 질투 속에 살고 있는가를 분별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과 빛은 함께 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므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너희가 들은 대로 형제를 사랑하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사랑 과 같은 자기희생적인 사랑으로 서로서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만일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가인과 같이 살인하는 자요 동시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유황불 붙는 음부의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비취게 하고 소망과 기쁨 가운데 감사하는 생활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주님과 우리는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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