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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본질 (요일 03: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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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3:1-12까지 이단에 대한 경계를 준 저자는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사랑을 강조하고 이를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며 사랑을 실천함으로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사랑의 신적 요소를 완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나의 생애에 있어서 단 한번의 전도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요한 일서 3: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의 말씀을 택하여 전도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일생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핵심 성구로 삼을 것입니다. 이 성구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으니 첫째는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말씀이요, 둘째는 예수 안에서 자유 함을 받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여야 할 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다만 주의를 요하는 것은 우리에게 은총에 의한 구속이 먼저 있고 은총에 의한 생활은 나중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구속이 근본이 되고 생활은 구속의 사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구속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인 성애라 할 수 있고 생활은 일반적인 박애의 사랑으로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기독교의 중심 과제가 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까지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으니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들, 맑은 시냇물, 어여쁜 새들, 좋은 친구들, 그리고 풍성한 열매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말 세상은 아름답고 멋지게 창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었으나 우리 인간의 죄가 세상을 더럽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를 완전히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는 진리와 영광이 가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 신앙의 중심에 모시면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돈이나 지위나 세상을 예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예수 안에 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을 행하여 의롭게 되고자 하나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하면 여전히 죄인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의 이름을 믿어야만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자기가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예수께서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심으로 예수와 우리는 서로 원수 상태에서 화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죄인이었던 인간들이 하나님과 잃었던 정상적인 관계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자신을, 상실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희생 속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게 된 사실을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 1:22-24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죄인이라고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죽으심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는 주님이 자신을 위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고 구속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빌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였듯이 주님은 자기의 명예와 권세까지도 포기하시고 사람의 형체를 가지시고 생명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멸시 천대뿐 아니라 죽음의 고통까지도 달게 받는 사랑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베푸신 것은 인간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소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가장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사랑의 본질은 자기를 내어주는 절대적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기독교인의 생활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생활이 변화하게 됩니다. 이전에 이기적이던 생각이 변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희생을 하게 됩니다. 불평과 불만 속에 살던 생활이 감사와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는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만 참된 기독교의 정신과 형제애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형제애는 통속적으로 말하는 박애사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박애는 이상주의에 의한 도덕적 의무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형제애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사랑의 결과에 의한 것입니다. 종교적 사랑이란 은총에 의한 사랑입니다. 이 시대는 참된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주리고 있습니다. 가정에도 사회에도 나라에도 사랑이 메말라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쓸쓸하고 허탄하기조차 합니다. 따라서 가물어 메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리듯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랑을 경험한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이 사랑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말고 묵묵히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랑을 할 때 세상은 활기차고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못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먼저 찾아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모든 것을 용서하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이 가득 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의 생활은 삶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랑으로 인해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기쁨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모든 행위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행위는 사랑이 있어야만 참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생활 중에 나타나는 사랑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주님께서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라야 의사가 소용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젖을 달라고 우는 어린아이는 그냥 두고 잘 놀고 있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그냥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랑을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움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사랑은 그 사람이 구원 받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 61:1-2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하였듯이 우리는 고난당하는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등을 돌아보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남들이 배부르게 먹고 즐길 때 굶주림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찾아가며 남들이 건강한 몸으로 뛰놀 때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누누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자발적이듯이 우리의 사랑도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사랑을 실천하시길 바라되 입과 혀로만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희생적인 사랑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행하실 때 주님은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시는 생활을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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