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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요이 0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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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는 교회에는 요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슬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교인들 중에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듣는 것은 기쁜 일이요 그렇지 못한 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요리문답 제 2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규칙이라 하였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알아봅시다.

1. 진리를 행함으로 본문 4절에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하였습니다. 딤전 2:4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예수 안에 사는 것이 참 진리를 행하는 기본이니 진리 안에서 언제나 순종하고 헌신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생활하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기쁨을 얻게 되고 참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에게는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이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아이들이 자라나서 부모님께 잘하는 것을 보면 그 힘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마냥 즐거워하십니다. 따라서 어머니 품안에서 자라는 어린아이는 가장 행복한 것이며 아울러 어머니에게도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품을 떠난 고아들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탁아소나 고아원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자라나니 정말 불쌍합니다. 마찬가지로 주 안에서 사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므로 어머니 품안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본입니다.

2. 서로 사랑함으로 5절에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은 부르심을 받는 자녀들 간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생활 표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심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다 같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진리와 사랑의 기초 위에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사랑을 위한 상징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형제자매 된 성도들 간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전 위에 높이 솟아있는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집은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심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며 외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또한 사랑을 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되는 것이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므로 성도와 교회는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적그리스도를 대적함으로 본문 7-8절에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나타나는 많은 이단들이 어떻게 믿는 자들을 미혹할 것이며 이에 대처할 우리들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 분명해야 합니다. 결코 타협이나 용납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단호하게 베어내야 합니다. 만일 조금씩 양보하거나 타협을 하다보면 어느덧 나 자신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왕상 18 장에 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웠습니다. 엘리야는 참 하나님이 과연 누구인가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하였습니다. 목숨까지 걸고 최선을 다했을 때 승리는 엘리야의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승리하였으나 들뜨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다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단호하게 대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단과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것에 대해 마 23:13-15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나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추호도 용납함이 없었습니다. 바울도 또한 이단자들과 적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하게 싸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단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삼켜 멸망으로 인도하려는 자들이기에 목숨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집에 강도가 들어와 여러분의 목숨을 해하려 하면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 물리치려 할 것입니다. 잠시 있는 생명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이 걸린 일에 대해 결코 호락호락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이 와서 여러분의 담대한 신앙에 의하여 오히려 감화 감동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단자들을 잘못 처리하다가는 교회도 커다란 시험에 들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단자들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합니다. 한번은 사도 요한이 예수를 부인한 센티투스와 함께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센티투스는 예수를 믿었으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에 사도 요한은 “진리의 원수인 센티투스가 여기 있으니 이 건물이 우리 위에 무너질런지 모르니 어서 피하자” 면서 피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이단자를 멀리하였습니다. 아울러 이단자들은 대개 과학적인 근거나 문자적인 해석을 가지고 질문을 해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혹은 현재 교회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 또는 천국은 없고 다만 이 땅에 천국이 건설된다. 예수님은 육체로 온 것이 아니라 신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 하면서 접근해 옵니다. 따라서 신앙과 성서적 지식이 없이는 이들에게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섣불리 이단자를 대하기보다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 하는 것이지 결코 무서워서 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단자나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거나 변화시키십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대적하시기 위해서 엘리야를 택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단자들을 변화시키고 물리치게 할 예언자들을 택하여 무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만 이들을 멀리하여 흠 없고 순결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건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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