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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계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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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을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이 즐겨 쓰시는 말씀이 곧 “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즐겨 쓰시며 자주 쓰시는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도 같이 온 성경을 통하여 울리어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겠읍니까?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전 노아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겠읍니까? 사도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라! 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오라는 이 말씀 한 마디 속에는 우리 기 독교의 복음의 성격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라는 소리를 복음이라고 한다면 가라는 음성은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질러 있는 큰 구렁텅이를 보여주고 있으나, 복음은 그 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양떼 앞에서 인도하시면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즐겨 쓰시는 말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 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전 세계는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의 행위 뿐만 아니라 저들의 생각까지도 부패하여 홍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랑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심을 후회까지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에 땅 위의 모든 생물이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온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생물이 홍수로 인하여 다 죽었으나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은 방주에 들어가서 살아남았습니다. 죽음, 이 죽음이야말로 우 주적인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방주는 오늘의 교회의 상징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세계의 죄악과 그 심판의 물결 위에 떠 있다고는 하더라도 이 교회는 사람의 아 들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대사로서 “너와 너의 온 집은 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명료히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저 이 교회는 변론과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멸망하는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하시던 것처럼 방주로 들어오라 하실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세계 만민 누구에게나 교회로 찾아 오라고 하는 초청의 소리를 단순한 사람의 말이나 목사의 소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입니다. 오라, 이 말씀으로 대속의 역 사는 시작되고 또 끝나는 것입니다. 홍수가 전 세계를 쉽쓸 때 하나님은 노아를 향하여 방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본다면 죄와 흑암의 세력으로 더불어 싸우던 오랜 싸움이 끝난 때에 성령과 신부가 한 가지로 오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지상 세상 말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따뜻한 봄날 아 침, 여리고 성벽을 의지하고 양지쪽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 바디매오가 있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앞 못보는 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로써 듣는 귀가 더 발달하여 저는 이 소리가 보통 사람의 행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중 틈에 뛰어 들어가 군중의 옷자락을 잡고 무슨 일이 생겼으며 저 군중이 떠드는 소리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습니다. 바디매오의 질문을 받았던 군중의 한 사람은 옷깃을 감싸 쥐고 빨리 지나가면서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는 입 속으로 불러 보았습니다. 대단히 낮익은 이름이요 어디선가 들은 듯했습니다. 옳아.! 어떤 사람은 예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 예수로구나 하고 혼자 속으로 다시 불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 예수는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라고 하던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생각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읜 외치는 소리가 군중들의 떠드는 소리보다도 더 크게 울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 바디매오의 외치는 소리는 그 부근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문 근처에서 구걸하던 다른 거지들이 놀랐는지 도 모릅니다. 그 중에는 “시끄러우니 잠잠하라”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너무 떠들면 관리들이 잡아다가 옥에 던질지도 모를 것이라고 말한 거지도 있은 듯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장로들이 이맛살을 찌푸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도 주님을 모시고 다니던 제자들은 의기가 양양하여 점잖은 어른이 지나가시는데 무슨 행패냐고 책망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좋지 못한 일은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잠잠하라고 제지하면 하는 만큼 더욱 더 소리를 높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발걸음은 멈췄습니다. 많은 소리가 지나갔으나 그러나 예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디매오의 소리였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하여 전능자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언제나 지나가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 그는 또 가만히 그 발길을 멈추시고 서서 듣습니다. 예수께서 발길을 멈추시자 그 성 중 어른들은 나와서 사과했을 것입니다. 그 소리는 거지의 외침이니 관념하실 바 가 아니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변명을 듣지 아니하시 고 데려 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거지인 바디매오는 이 세상의 빛되는 예수 앞에 떨리는 몸으로 나와 섰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사람의 요구를 아시지만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시는 물으심에 저는 옷을 요구하지 않고, 집, 금전. 권세를 요구하지 않고,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여기에는 오라는 말은 쓰여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오게 하기 위하여 그를 불렀습니다. 이야기 가운데 소경 바디매오가 한 일이 세 가지 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첫째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부르실 때 달려 나왔습니다. 말씀하실 때 믿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첫째, 지나가시려 했고. 다음으로 머물러 서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디매오를 자기 앞으로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런고로 만약 이날 아침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았더면 저는 일생 소경으로 지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오늘로 마지막 기회가 될른지 모릅니다. 오.! 형제 자매여, 주님은 오라고 하십니다. 눈 멀고 병든 자만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했습니다.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2. 값 없이 생수를 받으라

(1) 내세의 영생의 은혜를 강수에 비유했습니다. 본문 17절에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의 은혜를 값 없이 거저 주십니다. 영생의 생수가 낮고 천해서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 귀하기 때문에, 영생수는 사람의 힘으로는 값을 마련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영생수를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습니까? 1) 겸손입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나니 복음을 믿어 영생수를 받는 자는 자초지종 겸손을 그 자격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팔복 중 첫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 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약 4:6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 1:27에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겸손할 줄 아나 실상은 교만할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교만인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하나님은 늘 말씀으로 자신을 대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강단이 제일 중요합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목사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2)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영생의 물은 풍부하여 남에게 얼마든지 줄 수 있을만큼 풍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자에게 끝없이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강수처럼 많은 물이 흘러 내리는데 한 잔의 물을 떠서 그것을 남에게 주지 않으려 아끼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행 20:35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3) 강수는 쉬지 않고 흐릅니다. 생명은 움직이고 있는 법입니다. 강수는 어디에나 머무름이 없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강수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사람 속의 피도 머무는 날이 없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는 동안도 피는 흐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은혜도 쉬지 않고 흘러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항상 새로 밀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은혜의 강이 말라 생명이 없는 자가 됩니다. 히 4:16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를 얻기 위하여 새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현대의 죄악은 그 도수가 너무 깊이 발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이기려면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2) 내세에는 하나님의 생명수의 은혜가 사람에게 물과 같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죄를 씻어 영혼을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의 침투력과 같이 감화력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자는 물처럼 복음에 먼저 녹아서 물과 같이 감화력 있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진리에 목마른 자들이여, 주의 음성을 듣는대로 주 앞 에 나아가서 거저 주시는 생수를 받아 영복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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