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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상적 봉헌 (대상 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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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이상적인 봉헌을 하는 고백입니다. 다윗의 헌금자세가 우리 자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이상적인 봉헌

(1) 동기가 좋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세우려는 마음으로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드린 것입니다. 동기가 고상해야 고상한 봉헌이 됩니다. 장로나 되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하는 헌금은 정치자금에 불과합니다.

(2) 최상의 것들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해 금, 은, 동, 철 그 밖의 여러 가지 보석까지 바친 것입니다. 그것도 엄청난 양을 말합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헌물은 주께 합당해야 합니다. 쓰고 남은 찌꺼기나 바치는 것은 도리어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3) 그 자세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상한 동기를 가지고 아무리 고귀한 물건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그 드리는 자세가 좋지 않다면 주께 열납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그 자세 또한 일품입니다. 그래서 이상적입니다.

(4) 주님께 주님의 것을 바친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옛 성현들은 말하기를 우리 의 몸과 머 리 털 하나도 다 부모에 게 받았으니 이를 상하지 않게 잘 보존하는 것이 효라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아는 바대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 또는 우리의 자녀, 재물, 명예, 권세 등 우리에게 속한 것 중 어느 한가진들 우리의 것이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의 소유를 다 드려 보았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땀 흘려 번돈, 내가 밤잠 아니 자고 벌어서 아니먹고 안입고 안쓰고 푼푼히 절약하여 벌어 모은 것을 어떻게 바치느냐고 인색한 마음 갖지 말고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몸으로 갈 것이니 나의 소유는 언제나 빈것이요 내가 무엇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 주의 것이요 또 주께로 부터 일시 위임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주께서 필요하다고 요구하시면 영광으로 알고 즉시 즐거이 바치는 것이 우리의 바른 자세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축복받은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라. 백세에 얻은 아들인 동시에 언약의 아들인 이삭을 성혼도 하기 전 소년 시절에 청천벽력으로 갑자기 모리아 산으로 끌고 가서 내게 번제로 잡아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일언반구의 불평이나 문의도 없이 응하게 된 것은 장중보옥 같이 귀한 독자라도 이는 자기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행한 반석 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심정과 정신이 아니고서는 우리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즐겁게 바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다윗의 봉헌 자세

(1) 감격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의 봉헌은 뜨거운 감격에서 드려지는 뜨거운 재물이었습니다. 사실 감격이 없는 재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을 드리든지 그리고 얼마를 드리든지 “나와 내 집이 무엇이관대……” 라는 뜨거운 감격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의 봉헌은 결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의 봉헌이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라 세금이 되고 맙니다. 헌금을 세금처럼 바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3) 겸손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감사한 생각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봉헌이라고 할지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겸손한 마음이란 곧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님께 드릴 뿐이라는 생각을 말합니다. 마치 내 것으로 주님께 적선이라도 하는 듯 착각하고 드리는 봉헌은 봉헌이 아니라 자기 소유의 시위인 것입니다. 무릇 봉헌은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4) 자진 열납하는 헌금입니다. 헌금의 바른 자세는 무엇보다도 스스로 원하는 마음에서 성심껏 드릴 것이며 또한 기쁨으로 드릴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부모님께 무엇을 드릴 때에도 마음에도 없는 것을 남의 눈이나 체면을 생각해서 억지로 드린다면 이는 부모에게 도리어 가시가 됩니다. 작은 것이라도 정성을 모아서 기쁨으로 드린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야 더 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교부 성어거스틴은 말할기를 “네가 네 떡을 인색한 마음으로 남에게 주면 너는 네 떡도 잃고 네 상급도 잃느니라”고 하였으니 정말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입니다. 마음에 없는 봉사, 헌금은 결국 아무런 열매도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의 시간와 물질의 손해만 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됩니다. 눅 21:1-4에 나타난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 드린 일에 대한 주님의 칭찬하신 바를 잊지 말것입니다.

3. 헌금 표준 교회마다 헌금통계에 신경을 씁니다. 헌금은 곧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에 그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많은 헌금들이 과연 이상적인 봉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까? 봉헌은 그것을 드리는 나 자신과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함께 유익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익이란 그의 기쁨과 영광을 말하는 것이고 나의 유익이란 내가 받을 은혜와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진노를 내게는 저주를 초래하는 것이라면 봉헌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헌금 정책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리처럼 헌금을 짜내기에 혈안이 돼버린 교역자나 바리새인처럼 헌금을 자기 선전의 도구로 착각하는 교인들도 오늘의 교회를 시장화하고 있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뻐하시도록 하기는 커녕 채찍을 드시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표준은 하나님께서 제도적으로 정해 놓으신 것이 모든 소득의 10분의 1이라 하면 자유헌금의 표준은 힘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 기록된대로 완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함이라 했는데 이 자유 헌금에 있어서 힘대로 드리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코 하나님 앞에 무성의한 것이니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는 헌금이라 하겠습니다. 십일조 헌금와 자유헌금을 분간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성물로서 신성불가침한 것이며 우리 성도들의 절대적인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자유헌금은 완전히 구별된 십일조를 제외한 10분의 9즉 자기에게 허락된 소유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자진하여 열납할 때 참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헌금은 남의 이목이나 체면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깨끗하고 명확한 행위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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