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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이후 2 (요일 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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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져야 될 삶의 두 번째 자세는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고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4절, 5절 말씀 “대저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 승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들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하고도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즐거움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감옥에 들어가도 그 속에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십니다. 실패와 어둠 앞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넘쳐나는 것은 구원의 즐거움입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면서도 마음속에 즐거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모함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 구원의 즐거움 때문에 살았다고 성경 속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셔야 됩니다. 늘 진지하게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기쁨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할 때,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귐을 가질 때 옵니다. 여행 갈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같이 가는 사람과의 관계가 흐트러지면 경치가 경치로 안보입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볼 것도 별로 없는 곳일지라도 나와 함께 가는 분이 즐겁고 대화가 즐거우면 기쁨을 누리고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때에 우리들 속에 기쁨이 옵니다. 또 우리가 성장할 때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저의 4살짜리 아이가 요즘 전화하면 “지은아 너 뭐하니?” 하고 물으면, “지금 전화 받고 있지 뭐하긴 뭐해." 라고 대답합니다. 신기하지요. 아이가 처음 태어나서 고물고물할 그 때 처음 뒤집는데 얼마나 신기한지요. 길 때, 벽을 잡고 일어날 때, 한발 한발 걸을 때 참 기쁨이 있습니다. 성장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자녀를 낳았는데 그 속에서 그 자녀가 마음이든 육체든 성장하지 아니할 때 근심 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이유는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사실과 구원에 대한 기쁨은 다른 것입니다. 자녀가 집에서 잘못했을 때 "야 너 호적 파가지고 나가. 내 자식이 아니야." 그런다고 해서 내 자녀가 아닙니까? 관계는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편하면 자녀도 재미가 없지만 부모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녀가 내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때는 기쁨의 교제를 나누고 즐거움이 있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면 하나님의 자녀, 구원의 자녀는 틀림없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내 삶 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는 것은 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내 마을에 기쁨이 없고 확신이 없고 무거우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의 문제를 빨리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릴 적에 집에 돌아오면 저의 어머님이 부흥회에 잘 가셨습니다. 귀퉁이 날아간 상에다가 식은 시래깃국과 식은 밥에 옛날 어른들이 쓰던 글씨로 '형준아 밥 먹고 열심히 공부해라' 하면서 10원을 두고 갔습니다. 지금은 10원이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거액이었습니다. 10원 가지고 제가 만화가게를 갑니다. 지금 만화는 위험하지만 그때는 꿈을 심어 주기도 했지요. 만화를 보다가 울기도하고 웃기도 합니다. 만화를 보다가 꼭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작가가 끊습니다. 그럼 집에 돌아와서 걱정이 돼서 저녁에 잘 때 기도하고 잡니다. ‘하나님 주인공을 꼭 구원해 주세요. 꼭 만나게 해주세요. 그 악당에게 이겨야 되요.’ 참 순진했지요? 얼마나 성실히 만화가게를 갔는지 만화가게 주인이 저에게 맡겨놓고 시장 갔다 오곤 했습니다. 시장 갔다 오시는 그 사이에 보는 만화는 공짜였습니다. 만화를 공짜로 보기 위해 만화 속독법을 연구해서, 지금도 만화는 굉장히 빨리 봅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면서 만화가게에 제가 꼭 봐야 될 만화가 나온 것입니다. '야 이걸 봐야 되는데' 그러나 그날따라 어머니가 부흥회에 안가셨습니다. 부흥회에 안 가셨다는 건 용돈이 없다는 뜻이지요. 고민을 하다 드디어 마음에 한 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돈을 훔치기로. 찬장에 있는 10원을 훔쳤습니다. 장차 받을 고난은 지금의 기쁨과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만화가게로 달려갔습니다. 만화를 열심히 봤습니다. 끝나고 나니 겁이 덜컹 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어떻게 하나......’ 집에 들어갔는데 "형준아" 부르시면 가슴이 덜컹합니다. "여기 고구마 삶아놨으니까 와서 먹어라." 고구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귀찮습니다. "바지 사왔다 봐라" 선물 줘도 귀찮고 가까이 오는 것도 귀찮고 말 부치는 것도 귀찮고 부르는 게 전부다 '너 훔쳐갔지' 묻는 거 같아서 점점 어머니와 멀어집니다. 가능하면 대화도 않고 밥 먹는 시간 내내 고개도 떨구고 있는 것이지요. "너 왜 그러니?" "괜찮아요. 별 일없어요." 드디어 들켰습니다. 실컷 얻어터졌습니다. 제가 얻어터지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머님이 때리셔 놓고 제가 불쌍했는지 10원을 주셨습니다. 흥부가 주걱으로 맞으면서도 밥풀을 떼먹는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때부터 용돈이 없으면 "엄마 나 때려라 그리고 10원 도." 어머니가 정한 법칙을 깨트리니까 어머니와 멀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을 깨트리니까 그 법칙을 어긴 나는 법칙을 주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즐거움과 기쁨을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없으니 기도해도 재미없고, 교회가도 재미없고, 하나님이 은혜 준다해도 싫고, 교회와서 봉사하래도 싫고, 하나님 축복 주신다해도 다 귀찮은 것입니다. “건들지만 말아다오!” 우리를 무감각하게 무감동하게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 죄의 영향입니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더 적극적인 방법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 사랑의 말씀을 읽을 때에 내 속에서 주님과 더 깊은 교제가 일어납니다. 또한 주님과 대화를 할 때에, 서로 함께 교제를 가질 때에 그 속에서 더 큰 사랑이 일어납니다. 바로 기도 생활과 말씀 보는 생활입니다. 말씀 보고 기도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 즐거움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의 기쁨이 없으면 병이 듭니다. 병이 들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입맛이 없어집니다. 내 영이 병들면 성경이 지루해지지요. 설교가 지루 하고 기도하는 생활이 얼마나 귀찮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다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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