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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그래도 아버지를 용서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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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한참 바쁜 농사철에 건설현장으로 일 나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혼자 농사일을 하느라 무리하신 탓이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집안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여러 날을 술로 지새우던 아버지는 어미 잡고 태어난 년이라며 갓 태어난 나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며칠씩 굶기기도 하고 한여름에 두꺼운 이불로 싸서 벽장 속에 넣어 두기도 했는데, 언니 오빠들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살아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눈에만 띄면 매를 맞았고 말리는 언니 오빠들도 함께 곤욕을 치르곤 했다. 참다 못한 큰오빠는 가출을 했다. 얼마 뒤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큰언니는 편지를 보다 말고 나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더니 자리잡히면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 버렸다. 그제야 아버지도 정신이 좀 드셨는지 술도 줄이고 묵혀 놓은 논밭 손질도 새로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느닷없이 새옷을 사다가 내게 입히시더니, 신작로로 데리고 가 한복판에 앉혀 놓고는 차가 알아서 피해 갈 테니 꼼짝 말고 놀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좀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척하면서 힐끔힐끔 나를 감시했다. 지나가는 차들이 빵빵거리며 비키라고 야단이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더 무서웠다. 어쩔 줄 모르고 앉아 있던 나는 달려오는 커다란 트럭을 피하다가 그만 치이고 말았다. 멀리 아버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지만 금세 정신을 잃었다. 그 일로 나는 결국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아버지는 비정하게도 딸을 그렇게 죽이려 했던 것이다. 운 나쁘게 걸린 그 운전사는 아버지의 억지에 못 이겨 많은 돈을 보상해야 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큰오빠는 그 울분으로 자원입대해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큰언니 역시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대들다가 심하게 매를 맞은 뒤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돌아가셔도 장례식에조차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집을 나갔다.

나의 사고로 벌어들인 돈과 큰오빠의 전사 보상금으로 목돈이 생긴 아버지는 자주 읍내를 들락거리시더니 어느 날 젊은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새엄마였다. 세련되고 상냥한 그녀는 우리에게 호감을 샀고 동네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그러다가 임신을 했는데 아버지는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기뻐하셨다.

그 즈음부터 새엄마는 조금 달라졌다. 남들 앞에선 잘해 주면서도 뒤로는 구박을 많이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둘째오빠에게 앞으로는 기술을 익혀 두는 것이 시시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보다 낫다며 은근히 공장으로 가기를 바랐다.

물론 도시락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고 용돈 또한 없었다. 결국 한창 사춘기였던 오빠는 집을 나가 절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것은 셋째오빠와 작은언니, 나 셋뿐이었다. 심지가 굳은 셋째오빠는 새엄마의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일을 곧잘 도왔다. 하지만 작은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의 집 식모로 보내졌다.

그리고 곧 새엄마는 딸을 낳았다. 늦동이를 보신 아버지는 새엄마와 아기에게 푹 빠져 버렸다. 농사일은 오빠가, 집안일과 애 보기는 내 차지가 되었으며 두 분은 신혼부부인 양 여기저기 놀러 다니셨다. 늦동이가 없었다면 무슨 재미로 살꼬? 아버지의 혀끝에 붙어 버린 이 말을 들을 때면, 다른 자식은 종처럼 부리고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서 그저 막내만 예뻐하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괴로웠다.

열심히 공부한 셋째오빠는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읍사무소에 취직했다. 나 역시 오빠의 도움으로 무사히 여고를 졸업한 뒤 면사무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드디어 독립을 했던 것이다.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던가! 그뿐 아니라 언니들도 모두 좌절하지 않고 어렵게 공부한 뒤 지금은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다. 게다가 나는 뒤늦게 언니 오빠들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들게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의 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희망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장애는 아무것도 없다. 목발을 짚은 성치 못한 왼쪽 다리도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부모님과 우리 남매들의 원만치 못한 관계가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고향집에 찾아가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새엄마와 이젠 너무나 초라하게 늙어 버린 불쌍한 아버지. 고모 말에 의하면 새엄마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아버지를 무시하고 구박한다고 한다. 아!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런지….

지금도 큰언니는 내 왼쪽 다리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고향에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도 이해되고 언니도 불쌍하다. 언니가 어서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막내까지 우리 육남매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이 좋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소원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오늘도 나는 부지런히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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