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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종 2 (사 5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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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의 종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조롱하는 인간, 고난받는 메시아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을 우리는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 메시아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시아를 거부하고 혐오하고 적대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메시아가 실수를 했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인은 정반대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어두워진 마음과 허물과 죄와 실수가 드러날까 봐 악을 쓰고 철저하게 메시아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의 말씀에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통을 겪었고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를 당했으니 우리마저도 그를 무시해 버렸다.”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으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 멸시를 했습니다. 시쳇말로 발의 떼만도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메시아를 끌고 다니고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메시아가 실수를 해서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빛을 비춰주시고, 사랑을 보여주셨으며, 스스로 종노릇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맞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때리시고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했다.”이 말씀을 보면 ‘사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분이 그렇게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진짜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요, 그분이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입니다. 어떤 여자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인간관계의 문제, 시아버지의 문제, 시어머니의 문제, 시누이의 문제, 시동생들의 문제 등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모든 가족들이 ‘네가 시집을 왔기 때문에 우리 집이 이렇게 됐다.’고 며느리에게 몽땅 다 뒤집어 씌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며느리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또 시집을 보낸 친정 부모님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보다 더 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갖은 모욕과 멸시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대속의 은혜 4절을 보면 예수님은 병, 아픔, 고난을 짊어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류가 겪어야할 죄, 질병, 저주가 예수님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속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대속의 개념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대신 아프고, 대신 빚을 갚고, 대신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죄는 누가 대신 값을 치르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에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죄는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그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쌓이고 있을 뿐입니다.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되어 떨어지듯이 죄가 계속 쌓이면 언젠가 저주가 되어 뚝 떨어집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인간은 메시아가 고통을 당할 때,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수모를 당할 때, 철저하게 짓뭉개졌을 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TV를 보면 종종 흉악범이 나옵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어쩌면 저런 인간이 다 있을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흉악범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 사람은 죄가 드러나 경찰에 잡혔을 뿐이지 내 안에도 그런 분노와 저주와 살인을 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교양과 의지로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모든 허물을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인간은 대신 죗값을 치를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몽땅 뒤집어 씌워 감옥에 보냅니다. 인간이 메시아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인류를 위한 십자가 5절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고 우리의 악함이 그를 짓뭉갰다. 그가 책망을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아서 우리의 병이 나은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고통, 병,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의 허물이 예수를 찔렀고, 우리의 악함이 그를 짓뭉갰습니다. 예수님께서 찔림을 당하고 짓뭉개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평화를 누리고 건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너무 끔찍하고 잔인해서 흉악범들에게만 주던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이렇게 철저하게 짓뭉개지고 조롱을 당하셨습니까? 나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처음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한참 보면 예수는 없어지고 내 죄가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수치, 상상할 수 없이 더러운 죄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병이 낫습니다. 내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 죄와 저주가 십자가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네 단어가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짊어진 병’, ‘짊어진 아픔’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질고와 슬픔입니다. 질고는 질병, 재난, 근심, 병 등을 의미합니다. 슬픔은 아픔, 고통, 괴로움, 비탄 등을 의미합니다. 5절에서는 평화와 치유(병 나음)입니다. 내게서 병, 고통, 저주 등이 떠나니까 평화가 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마음에 비탄과 상처와 저주와 고통이 다 떠나가고 예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짊어짐으로 우리가 치유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정신분열, 상처, 우울증이 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놀라운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현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메시아의 침묵 6절입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시고 그를 공격하셨다.”하나님께서 메시아를 공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씌워진 모든 병과 슬픔을 벗기지 않으시고 그냥 두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제각각 자기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을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우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대속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메시아는 어떤 반응을 했을까요? 억울하다고 했을까요? 분하다고 했을까요?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의 반응을 7절에서 9절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학대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을 깎이는 잠잠한 어미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강제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처형을 받았지만 땅에서 그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가 당하는 것은 내 백성의 죄악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기라도 한 사람이 우리 세대 가운데 누가 있느냐? 폭행을 한 적도 없고 거짓말을 입에 담은 적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악인과 함께 두었고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묻어버렸다.”고난에 대한 메시아의 반응이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끝까지 침묵했습니다. 예수님은 학대를 받고 괴로움을 당했지만 결코 입을 열어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온누리교회는 오래전에 한동대학교 때문에 2-3년 동안 공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로마서를 설교할 때였습니다. 저희 교인들에게 제가 외화를 밀반출했고, 교회 돈을 횡령했고, 마약을 복용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9번이나 보내고, 저를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우리 교인들과 저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무죄판결을 받았고 법적으로 다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온누리교회가 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건이 끝나는 날 바이올라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주겠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사인을 보내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침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변명하고 싶은데 변명하지 않고, 무죄를 말하고 싶은데 무죄를 말하지 않고, 당장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참고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항하지 않는 이유 둘째, 그분은 순한 양처럼 저항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요즘처럼 데모하고, 할 소리 다하고, 고발하고 주장하는 세대와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요즘 세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대신 죗값을 치르면서도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잘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이라는 말과 ‘털을 깎이는 잠잠한 어미 양처럼’이라는 말입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따질 것 다 따지고 주장할 것 다 합니다. 그리고 나면 아무 은혜가 없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폭행도 거짓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유한 모습으로 고난을 겪었습니다. 9절에서 말하는 ‘그의 무덤을 악인과 함께 두었고.’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곁에 같이 못박힌 두 강도를 말합니다. ‘부자와 함께 묻어버렸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힌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최후였습니다. 예수님은 최후까지 침묵하고 순종하고 온유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이런 성숙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뚫고 부르는 개선가 고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그러나 그가 병들어 으스러진 것은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이었다. 그가 그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자손을 보면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이 그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다.”첫째, 자손의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자손을 보면서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11절입니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서 그가 알고 있었던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이뤄 냈음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내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질 것이다.”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을 몫으로 나눠 주고 강한 사람들을 전리품으로 나눠 주겠다. 그가 자기 목숨을 죽음으로 내던지고 죄 지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죄 지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했기 때문이다.”많은 사람들을 승리의 몫으로 주고 강한 사람들을 전리품으로 나눠 주는 이런 승리의 축복이 있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분은 이 땅에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33년 동안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대로 그는 사람들의 수모와 채찍과 모멸과 무시를 당하고 환영받지 못하고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부활시키셨습니다. 화해자로 부르시는 하나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병, 저주, 죽음, 고통이 십자가로 옮겨갑니다. 그것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받은 구원입니다. 다시금 질병 속에 살지 말고, 저주 속에 살지 말고, 고통 속에 살지 마십시오. 자살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우리의 병을,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분이 메시아, 여호와의 종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메시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메시아는 할 말이 많은 데도 침묵하고 순종합니다. 할 말 다하는 사람은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고, 알면서 속아주고, 대신 대가를 치르고, 허물을 대신 뒤집어쓰는 사람이 정말 두려운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분들이 온누리교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메시아적 성품, 인격, 믿음을 가진 분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 것입니다. 여러분, 북한 주민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북한에 상처를 받은 것만큼 남한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세뇌를 받으며 50여 년을 살았습니다. 누가 이것을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싸우고 죽여서 원수를 갚는 길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중재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피의 보복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이 화해자가 되어야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화해자는 교회라고 믿습니다. 남북갈등, 지역갈등, 사상갈등 등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십자가의 축복이 오늘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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