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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이후 (요일 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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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기도할 때는 손을 꼭 모으는 권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시골 화장실 가보셨습니까? 그냥 땅을 파서 나무만 두 개 걸쳐놓아 밤에 가면 빠지기 십상입니다. 이 권사님이 밤에 화장실에 갔다가 그만 빠져 들어가는데 설상가상으로 비도 오니, 그 다음 상황은 설명 안 해도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권사님 손이 화장실 나무판에 걸리면서 빠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걸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손을 모으는 순간 밑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 뒤에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을 성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취 뒤에 잘못해서 성취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그 사람 삶 속에 어려운 일이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실패한 경우도 있지만, 그 실패한 이후에 자기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서 오히려 더 유익된 결과로 만드는 일이 여러 사람의 삶의 여정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지난 3주간 동안 구원이 무엇인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여서 하나님의 사람, 우리는 영생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확신을 갖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우리가 영접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한 이후의 나의 삶은 어떻게 되어야 될 것인가. 이것은 영접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 현실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그 이후에 나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지 함께 나눠 보려고 합니다.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의 내 삶 첫 번째,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 요한일서 5장 10절에서 12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아멘.”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그리고 주보를 영생이라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런데 이 영생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주보를 책안에 끼워 넣습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도 나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미 내 속에 영생함에 대한, 구속함에 대한 선물을 이미 받았다는 것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증거 해줍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신앙 생활하면서 참 많이 듣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데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맘속에 받아들이고 난 후에도 제 삶은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답답하기도 하고, 의심이 되기도 하고 정말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는 확신이 없어서 때로는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적지 아니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초청 부흥회나 새로운 믿음의 식구들 영접하는 시간만 되면 그때 마다 일어나도 마음에 확신은 없고 일어서서도 내가 왜 일어섰는가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오늘 몇 가지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소식을 증거하고 가르쳐준 분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가르쳐준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으로 하여금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야기해주는 것도 믿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이미 구원받았다. 영생함이 이미 너에게 있다’ 고 확정시켜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 우리 동네 앞에 웬 사람이 트럭에 텔레비전을 가득 싣고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유명한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입니다. 그런 사람이 전해주면 제가 그 사실을 안 믿습니다. '저분이 또 거짓말 하시는구나.'잠시 뒤에 동네 앞에서 장사하는 분 "목사님! 목사님! 이상하죠. 어떤 사람이 트럭에 텔레비전을 싣고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생각하겠지요. '아 동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나나 보구나.' 그러나 저 사람의 말을 믿으려 하니 저 사람은 "밑지는 장사입니다. 본전 밑으로 드리는 겁니다." 하면서 장사를 하시지만, 나중에 굉장히 많은 이윤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 말도 별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반신반의 하고 있을 때 아주 신실하고 저와 가까우면서도 거짓말이 없는 분이 저에게 와서 "목사님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웬 사람이 텔레비전을 우리 교회 앞에 세워놓고 동네사람에게 나눠주고 있어요." 여러분께서 만약 저에게 ‘그 말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신다면 저는 ‘믿는다. 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분은 신실하신 분이니까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한번도 안하셨을 뿐 아니라, 저하고는 아주 가깝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을 또 그분이 하는 말을 다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실을 믿고 안 믿고에 대한 것은 어떤 사실이나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누가 전해주는가에 따라서 결정할 수 있음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참 구속과 영생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한 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보신 말씀의 9절, 10절을 다시 읽어보면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로마서 4장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사람의 증거보다 하나님의 증거를 받았을 때 그 증거를 믿음으로, 삶의 실천으로 옮겼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환경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고 내가 혼자 더듬어서 상상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전부다 믿습니다. 믿지만 그것보다도 확실한 증거, 한번도 식언치 아니하시고 한번도 거짓말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밝히시고 증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에 대해서 확정시켜 주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환경과 다른 사람 이야기보다 더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확신할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겼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분 마음속에 의심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요동하고 있고 확신이 없다고 하는 분들을 위해 또 다른 이야기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F. D 마요라는 사람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이 비유하는 것은 사실(FACT)이라는 사람과 감정(FEELING))이라는 사람과 믿음(FAITH)이라는 세 사람이 한 다리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일어난 분명한 사실, 현실을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지구는 둥글다. 지구는 자전한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여러분 이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해도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동설을 믿지 않아, 재판에서 잠시 자신의 의견을 부인해서 목숨은 건졌습니다. 부당한 판결을 뒤로 하고 나올 때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고 했던 말은 유명한 말이 아닙니까? 아무리 모함해도 사실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느낌, 감정(FEELING)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변화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희노애락으로 나누지 않습니까. 우리가 즐겁고 분노할 때도 있고 기뻐할 때도 있고 슬퍼할 때도 있고 즐거워하면서 많은 사람과 더불어 나눌 때도 있는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도 바뀝니다. 울 때도 있고 즐거울 때도 있고,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사실에 근거했을 때는 변함이 없으나 환경에 근거하고 있다면 믿음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기쁘면 믿음도 따라 기뻐합니다. 내가 슬퍼하면 그 믿음도 슬퍼합니다. 즐거워하면 믿음도 즐거워하는 믿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새가 노래한다.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가 운다. 합니다. 보는 이의 마음의 감정이 어떠하냐에 따라 울게도 보이고 노래하게도 보이는 것이 감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는 감정에 믿음이 근거하고 있으면, 우리 믿음은 계속해서 요동칩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도 진짜 옥상에서 떨어져 보십시오. 기분처럼 날아가지 않고,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기분하고 상관없습니다. 사실은, 진리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이 부흥회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방언 받고 할렐루야 할 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구원받음이 확실한 것 같은데, 때때로 실패와 질병과 어려움이 찾아오면 우리 맘속에 찾아오는 생각은 의심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는 계신가, 내 기도를 듣고 계신가, 나에게 응답하시는 분이 맞는가.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틀림이 없는가?’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시편 119편 89절에 “주의 말씀이 영영히 하늘에 굳게 섰다” 고 말씀하고 있고, 민수기 23장 19절에 “어찌 그 말씀 하신 바를 행치 아니하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시랴.”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지난 주 까지 나눴던 저와 여러분의 운명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죄가 우리들 마음속에 찾아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한번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 값을 치루기 위한 심판이 있고, 심판에 따라서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운명에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짊어져야 될 모든 죄의 대가를, 죄의 저주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우리가 받을 죄의 저주를 대신 받게 하심으로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님은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죄의 사슬을 벗고 구원과 영생함을 주시며, 주님은 우리 주님이 되시고 오늘도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그 사실, 이것이 바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시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따라서 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따라서 오늘 우리를 다루어 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의 변하는 감정에 따라 구원의 문제가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엎어지건 넘어지건 한번 약속하신 구원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 그 확신 가운데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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