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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길 (롬 0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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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롬5:6-11)김해에 중국 민항기가 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기 위해서 그 비행기를 탔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미래와 풍성한 삶, 더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사건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다가오며,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란 문제 앞에 우리는 가끔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대학에는 필수 과목과 선택 과목이 있습니다.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여 듣는 것이 선택 과목이고,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목을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필수 과목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필수과목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라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내가 왜 죽어야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 있습니까? 나아가 ‘오해와 미움으로 인해 발생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집터 위에 얼굴을 감싸 안고 앉아 있는 팔레스타인 여인 그리고 비행기 사고로 가족을 잃고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보며 왜 이토록 갈등과 다툼, 나누어짐과 부서짐, 깨어짐과 슬픔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인가?’하는 것을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본적이 있으십니까?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인생의 마지막 운명과 우리의 본래 출발점이 어디였는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살도록 저와 여러분들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성, 감정, 의지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도록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여러분 중에는 『나는 우연히 나타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분께서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코를 예로 들어 보십시다. 코가 거꾸로 달려 있다면 담배 피는 분들은 여기에 담배를 꽂고 다닐 겁니다. 학생들은 여기에 연필 꽂고 다닐 겁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비가 오면 코에 비가 들어갑니다. 여러분, 눈썹 한번 보십시오. 저는 아직 눈썹이 수직으로 생긴 분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눈 바로 위, 가로로 되어 있습니다. 가로로 생겼기 때문에 땀이나 비가 이마를 타고 흐르다 눈썹을 만나 옆으로 흘러 눈으로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아주 합리적으로 만들어져 있지요? 그리고 눈동자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눈을 깜박깜박하는데 눈에 먼지가 들어오면 자동으로 깜빡임으로써 먼지를 밖으로 쳐 내는 것입니다. 동시에, 한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망막에 물을 뿌려주면서 수분을 공급해 줌으로써 맑고 깨끗하게 씻어 주기까지 합니다. 전자동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알파벳을 공중으로 던져놓으면, 떨어지면서 저절로 록 펠러의 인생찬가 같은 시가 쓰여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가나다라’, ‘ㄱㄴ’, ‘아야어여’를 공중으로 휙 던져놓고 이것이 땅에 떨어지면서 우연히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나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깊이 고뇌한 인격으로 만들 때 감정이 담기고 운율이 생기고 내용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삶을 돌아볼 때 우리가 우연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과학적이고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잘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에 대해서 주님께서 직접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이렇게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교제를 통해 공급되는 것으로 살아가도록 만드셨는데, 어느 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겠다고 관계를 끊어버렸을 때부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죽음의 상태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오는 채워짐이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죽음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질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을 때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동일하게 이야기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은, 죄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말을 바꾸면 이 죄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대가는 죽음입니다. 죽음의 이유를 죄라고 말하는 성경은 또한 죽음이 우리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죽음 뒤에는 반드시 죄로 인한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운명이 육체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면 사람이『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음 이후에 받을 심판 그 심판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요약하면, 저와 여러분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고, 죄는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그러나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반드시 우리의 죄 값을 치루게 되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 그 심판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며칠 전에 30대 남자와 10대 소녀 2명이 28층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서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일찍 죽어버리는 것이 편할지도 모릅니다. 아픔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그것으로 인생이 끝난다고 얘기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후에 영원히 치루어질 형벌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정해진 운명이 바로 죽음이요, 죽음 이후의 심판이요, 심판 이후의 영원한 형벌인 것입니다.죄 가득한 세상, 죽음을 마지막 운명으로 하는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은 허무감, 두려움, 불안, 분쟁, 다툼, 질병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은 다시금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시도하며 온갖 노력을 합니다. 첫 번째로 인간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합니다. 인간의 철학과 이성 그리고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길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납니다.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연장을 사용할 수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지혜는 아닙니다. 초대교부 중의 한 사람이 삼위일체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방황을 했습니다. 바닷가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소년이 바닷물을 뜨고 있었습니다. “너! 지금 뭐하니?”하고 물어보니, “바닷물을 다 뜨고 있어요!”어린 소년은 바닷물을 다 뜨고 싶지만 결국 손에 담긴 손 크기만큼의 물 밖에는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이해하려 해도 내가 가진 것만큼의 지혜로 밖에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구나.’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중학생 한 명이 친구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아마 죽기 몇 분 전만해도 칼을 들고 자기를 죽이러 오는 친구는 상상도 못하고 ‘오늘은 수업 끝나고 나면 누구를 두들겨 팰까?’하고 계획을 짜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불가 몇 초 뒤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일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유한한 지혜입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 이르기 위해 인간은 또 다른 시도를 합니다. ‘착한 일 선한 일을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을까? 내가 이 땅을 살면서 착한 일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 구원 받을 수 있을 거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환경에 따라,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선과 악의 기준이 너무나 다른 것을 여러분 직접 보지 않습니까? 인간이 얼마만큼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정직한 나라가 “스위스”라고 합니다. 스위스는 차를 탈 때도 차표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 검사를 할 때 들키는 외국인들 중에 1위를 차지하는 외국인이 바로 한국 사람입니다.) 스위스는 물건을 두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깨끗하고 정직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검은 돈이 스위스 은행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인간은 선에 대해서 모순된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에 구호품이 전달되었을 때 교회 목사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구호품을 빼돌리는 것을 보면서 젊은 청년이 “목사님, 양심적으로 하시죠!”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변했구나! ’했더니, 이전에는 자기한테 상의하고 빼돌리더니 이후부터는 자기를 빼놓고 빼돌리더라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생각하면서도 부패한 우리 속성은 악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것입니다.하나님께 이르기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도덕과 윤리, 양심을 따라 살 때 참된 구원이 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심과 도덕과 윤리가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지침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데 울타리 역할을 해 주지만, 우리가 정말로 윤리와 도덕과 양심을 지킬만한 능력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솔직하게 돌아봐야 됩니다. 로마서 3장 20절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우리의 양심이나 도덕과 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그것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속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본인이 정말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세요. 내면 속에는 자신의 양심이 법이 되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어떤 의식에 참석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절 보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는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고 예식입니다. 그러나 의식 자체에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물동이를 이고 다니면서 세례를 주기 위해 지나간 사람 머리 위에 뿌려야 될 것입니다. 예배 의식 자체에 구원이 있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수많은 노력들, 우리의 지성과 지혜 그리고 선한 행실과 종교적인 삶, 율법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만 더욱 깨닫게 해주는 사실 앞에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길이 우리의 영역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인생을 살면서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감이 허무주의 철학, 실존주의적인 허무주의 철학을 낳게 된 계기도 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곳에 우리의 희망이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죽음과 심판 그리고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될 방법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합니다. 선한 사람을 위하여 혹 죽는 사람은 있지만, 악한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악하고 죄 가득한 상태인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얼마큼 사랑하셨나 하면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기 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우리 죄를 속죄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탕감해 주셨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요한복음 5장 24절은 좀더 자세히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여러분! 이 복음에는 세 가지 약속과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세 가지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고 사망으로 끝나는 우리 삶이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약속은 심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갈 우리들에게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에서 영원히 살 존재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뭘까요? 골로새서 1장 6절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고 되어있습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나라는 존재는 결국 죽는구나! 죄 때문에 죽는구나. 이 죄의 문제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삶과 인간의 모든 지혜와 노력을 다해도 사망에서 헤어날 수 없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부터 질병이 찾아오고 낙담과 좌절과 싸움과 다툼이 찾아오는 것이구나…… 아! 나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올무에서 건져낼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대신해 그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 죄 값을 치러 주시고, 나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구속 받지 않도록 구원을 베풀어 주셨구나!’여러분! 백번 천 번 듣는다고 깨닫는 것 아닙니다. ‘아! 나는 성경에서 수십 번 들었어! 예배 수없이 참석했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진정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조건은 듣고 깨닫는 것에 더해 그 사실을 “믿는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인격체를 받아들이는 것, 즉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는 상대방의 인격체를 받아들이고 또 그의 말과 행동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까? 요한계시록 3장 20절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이 스스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 왜 들어오려 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 마음에 문을 두드리는 예수는 우리 구주시라는 점, 들어오시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구주요 주님이십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구주가 되시기 위해서 그 분은 죽었습니다. 또한 구원 받고 용서 받은 우리 삶의 고비고비마다 도와주시고 간섭하는 주님이 되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6장 4절을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그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가 집의 문을 열어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영접하는 것과 똑같이, 문을 활짝 열어 드리면 됩니다. 그 분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구원과 새 삶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날 내 맘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시는 주님을 느끼게 되면, 마음 문을 열고 ‘내 마음 속에 오십시오.’ 라고 초청하십시오. 그러기만 하면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새로운 삶, 새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입니다. 이 시간 예수그리스도를 이전에 영접하시고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신 분들은 감사하고 찬양하시며 불분명한 영접이었다면 다시 한번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한 번도 복음을 접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이것은 진심으로 주님을 초청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왜 이제 내가 예수를 믿어야 할지 분명히 아셨습니까? 이 복음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신 것을 보셨습니까?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사해주시고 나의 구세주가 되신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그리고 나의 주인이 되셔서 인도하시고 생명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까? 함께 기도합시다.“주님! 이제 이 복음을 듣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로 인해 심판과 멸망의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나를 위해 주님이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셔서 나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을 내 마음에 초청합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초청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로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길을 출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생애 가장 중요한 결단인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이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 마음에 들어와 계신 것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더 이상 우리는 사망에 속한 자녀가 아니라 생명에 속한 자임을 알게 하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확신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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