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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당한 재판 (막 14: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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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유대인 셋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 없었으므로 셋이 가지고 있던 돈을 함께 묻었습니다. 그런데 셋 중의 하나가 몰래 그곳으로 되돌아가 돈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다음날 셋은 현인으로 알려진 솔로몬 왕에게 가서 셋 중에 누가 돈을 훔쳤는지 판결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대들 세 사람은 매우 영리한 사람들이니 재판에 앞서 먼저 너희들이 나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어 준다면 내가 그대들 세 사람의 문제를 재판하리라."했습니다. "한 처녀가 어느 남자에게 시집가기로 약속했는데 그만 그 처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고민하던 처녀는 맨 처음 약혼자를 만나 헤어지자고 제의를 하면서 위자료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첫 남자는 위자료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그녀와의 약혼을 취소했다. 그런데 그 녀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느 노인에게 유괴되었다. 그녀는 <나는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던 남성에게 약혼 취소를 제의 했더니 위자료를 받지 않고 해방시켜 주었는데 당신도 같은 일을 내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요구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돈을 받지 않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솔로몬 왕은 “이 중에서 누가 가장 칭찬 받을 행위를 한 사람인가?"하고 세사람에게 물었다. 첫번째 남자는 "그녀와 약혼하고 있다가 위자료도 받지 않고 약혼을 취소해 준 맨 처음 남자가 가장 칭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녀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결혼하려 하지 않았고 돈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했다. 다른 남자는 "아니옵니다. 처녀야말로 칭찬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용기를 가지고 맨 처음 남자에게 약혼의 취소를 제의하고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남자와 결혼했으니 이야말로 칭찬 받아야할 것이옵니다." 했다. 세번째 남자는 "이 이야기는 도무지 영문 모를 소리여서 저는 모르겠는데요. 첫째 유괴한 사람만 하더라도 돈 때문에 유괴했는데 돈도 받지 않고 놓아 준다는 따위는 이야기 줄거리가 도무지 통하지 않사옵니다."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솔로몬 왕은 "돈을 훔친 범인은 너다"하고 꾸짖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애정이나 처녀와 약혼자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관계, 그 사이에 긴장되어 있는 기분등에 이내 마음이 쏠렸는데 너는 돈 문제 밖에 생각지 않고 있으니 네가 범인임이 틀림 없구나" 했다고 합니다. . 이처럼 재판은 공정하고 분명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은 가장 불합리한 재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바로 가야바의 재판입니다. 가야바 대제사장은 주후 29-36년 까지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요 사두개 교인이었습니다. 빌라도의 선임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대 제사장 안나스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임시키고 그 사위인 가야바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습니다. 총독을 등에 엎고 장인 안나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은 가야바는 야비하고 교활하며 기회주의자였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사꾼이며 잔인한 자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고 세습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야바가 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교가 로마 총독에 의해 좌우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당시의 정치 종교상황이 얼마나 혼탁하고 타락하였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정당한 재판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음을 봅니다. 유대인들의 소송 중 중요한 소송은 야간에 재판할 수가 없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모든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낮에 재판을 하여야합니다. 숨어서 하는 재판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밤에 서둘러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모르게 자신들의 계획을 진행시키겠다는 내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중요한 재판은 이틀 동안 재판하여야 한다는 미쉬나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을 무시한다는 것은 불법이요,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루 만에 판결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들은 밤이 깊은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재판을 하기 위해 모여 있었으며 거짓증인들을 동원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잡아 빨리 죄를 씌워 죽이겠다는 속셈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재판에는 재판의 필수 조건인 변호인이 있어야 하는데도 변호를 맡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이들은 변호인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 필수 조건은 증인입니다. 성서는 죽일자에게는 반드시 두명의 증인을 정해야 만 합니다. (민35:30)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신17: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그래서 동원된 증인들도 급조된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증언하였지만 그것도 제대로 되지 못하였고 확신도 없고 분명한 증거도 들어 내지 못하였습니다. (막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그 증언도 서로 일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증인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불합리 속에서 진행된 재판이었습니다. 이러한 불합리 한 재판을 당 하시면서도 예수님은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의를 제시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계셨습니다.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불합리한 재판을 받으시되 잠잠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우리의 질고를 위해서였습니다. (사53:3-4)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에 시달린 영혼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와 함께 찾아온 질고는 인생에게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눅7: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그리고 그 몸을 우리를 위해 주심으로 우리를 모든 질병에서 구원하시려고 하신것입니다. (벧전2:25)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

2.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습니다. (사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주님이 이렇게 심문을 당하심은 바로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성서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50:1) 나 여호와가 이 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죄와 허물로 팔렸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사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저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 말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의지가 주님의 고난과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입니다.

3.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사53: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렸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징계를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바로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게 합니다. 하와에ㅐ게 찾아온 사단도 하와에게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라고 하면서 꾀었습니다. 그러나 먹고 난후에 어지 되었나요. 사단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끄는 대로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덜게 되었습니다. 탕자가 죄의 사슬에 끌려 다니게 되자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돼지와 함께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평화를 잃었습니다. 기쁨도 자유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종이 되어 주인의 눈치를 보며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떠하였습니까? 아버지도 평화를 잃으셨습니다.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먼 산만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아들보다 아버지의 마음의 고통은 더하셨습니다. 왜요 아버지가 허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들의 허물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은 사랑의 고통이었습니다. 곧 아버지의 고통이 바로 하나님의 고통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찌 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해 그런 수치와 고난을 격으시면서 모든 것을 잃은 아들에게 평화를 다시 심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견디셨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니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했던 양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일어나야합니다. 주님의 고난 앞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허물과 죄와 더러움을 고백하여야합니다. (사59:12)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주님은 바로 우리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려고 이렇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며 믿고 의지하는 자가 복이 됩니다. 그에게 치료의 광선을 발하실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참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넣었지만 주님은 이 곤경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하시고 그리로 친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그 귀한 사랑을 오늘 겸손한 맘으로 받아드리고 침 평안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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