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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악의 순간이 도약의 발판으로...! (요 19: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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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순간이 도약의 발판으로...!(요19:31-42)예수님이 이제는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항상 기적을 몰고 다니시던 분이셨고 죽은 자도 살리셨던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사형을 집행한 로마병정들이 인정한 일이었습니다. 33-34절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34절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눈으로 보아도 예수님은 분명 죽으셨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하나도 가질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허무했을까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죽음앞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허무(虛無)입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아 갈때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할것같지만 죽음이라는 단어앞에 서면 누구나가 허무를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들이 목숨걸고 따라다니던 예수님이 돌아가신것입니다. 예수님하고만 있으면 걱정근심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따라다닌다고 그동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했었는데…, 따라서 이제는 당장 먹고 살 일도 걱정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시험걱정을 안 만나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험걱정을 극복할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만일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없다면 이미 그 인생은 끝이라고 할수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것입니다. 최악의 순간이 된것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가질수 없는 상황!,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다! 라고 결정되어지는 순간…,이 순간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앞에 서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이 최악의 순간이…, 모든 것이 끝이라고 결정되어지는 이 순간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과정의 중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끝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계획의 한 과정이었다는 것이지요. 36-37절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37절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들이 알고보니 모두 이미 구약에 기록된 내용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으로, 내 판단으로는 도무지 해답이 없고 대책이 없는 일일지라도…, 내가 볼 때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아니면 너무나 슬프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그 가운데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모두 끝이라고 생각한 예수님의 죽음이 왜 하나님의 섭리과정이었는지?…, 분명 유대인들과 로마병정들의 방법대로 사형을 집행했는데 그것이 왜 하나님의 섭리과정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날은 금요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그들이 중요하게 지키는 안식일인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특별히 유대최대 명절인 유월절과 관계가 있는 날이라 다른 어느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날이었던것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은 중요한 안식일에 더러운 죄인인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안식일은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십자가에 달린 두강도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과 두강도가 못박혀 있던 시간은 사람의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면 보통은 2-3일, 길게는 일주일까지 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름동안이나 살아있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사형은 한번에 즉사시키는 사형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사형수들은 한방울 한방울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사형은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당하며 여러날동안 지옥의 저주를 맛보며 죽어가는 사형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사형은 단순히 죄인의 수준이 아니라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만 행하는 사형제도였던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지는 불과 대여섯시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면 안식일에 사람을 달아놓는 일이 생기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피하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빌라도를 찾아가서 죄인들의 다리를 꺽어 빨리 죽여달라고 요청한것입니다. 31절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대제사장들은 죄인들을 빨리 죽여달라고 하면서 왜 다리를 꺽어달라고 요청했을까요?. 십자가에 달리면 양손과 발에 못을 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면 체중에 의해 온 몸이 아래로 처져 양손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으면서 호흡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올려주어 호흡을 해야합니다. 그러다 다리에 통증이 심하면 다시 몸이 아래로 처지게 되구요. 그러면 다시 발에 힘을주어 몸을 위로 올려주는 고통을 반복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십자가 처형인것입니다. 그런데 그 몸을 받쳐주는 다리를 꺽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게해서 죽여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깨끗하게 죽여주면 좋을텐데 이들이 요구하는 방법은 정말 잔인해도 너무나 잔인한 방법이었던것입니다. 어쨌든 이들의 요구를 빌라도는 수용하였고 군인들에게 죄인들의 다리를 꺽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두 강도의 발을 꺽은 군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이미 죽었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다리를 꺽지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릅니다. 다리를 꺽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면 살았든지 죽었든지 다리를 꺽었어야 했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꺽지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던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이들이 성경을 알아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군인들이 즉흥적으로 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기막힌 결과를 가져왔던것입니다. 시34편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그 모든 뼈를 보호해주신다고 예언되어져 있는데 바로 그 모습이 예수님께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시 34:19-20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절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인, 곧 죄가 없으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9:9-12절을 보면 유대사람들은 유월절 명절 때 어린양을 잡아 자기 대신 피를 흘리게하고 그 고기를 먹었는데 그때 뼈는 그대로 놓고 살만 뜯어먹어야 했습니다. 절대로 유월절 어린양제물의 뼈를 꺽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법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민 9:9-12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10절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고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든 지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11절이월 십 사일 해 질 때 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12절아침까 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꺽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 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그런데 그 말씀이 아무것도 모르는 군인들에 의해서 성취되었던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예수님의 몸에서 물과 피가 따로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과 피는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와 정결의 상징이요, 물과 피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셨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과 로마병정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신들의 방법대로 예수님을 사형시켰다고 생각했을런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섭리였던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십니까?.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제부터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우리가 있게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장 우리의 눈과 생각에는 최악이고 끝이라고 판단되어질지라도 그 안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수있는것입니다. 이 진리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지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은혜를 나눌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이 최악의 순간에 보인 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의 행동입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아리마대요셉은 부자요(마 27:57), 산헤드린공회의 공회원(막15:43; 눅 23:50)이었습니다. 당시 산헤드린공회원이라면 유대나라에서 70명밖에 되지 않는 최고위급 귀족이었습니다. 니고데모도 유대인의 관원(요3:1)으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사건이 있기전에는 나름대로 "몰래신자"였습니다. 즉 평소에는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뒤에서 몰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38-39절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 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9절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남들이 알까봐 조심조심 믿던 사람이 이 최악의 순간에 오히려 최고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던것입니다. 아리마대요셉은 자신을 위해 준비해놓았던 무덤을 아낌없이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위해 수천수만의 생명을 희생시킨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은 그 귀한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완전히 왕따가 됨은 물론이요, 자칫하면 출교까지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향료 100근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백근이라함은 '100리트라'라고 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32kg정도가 되는 양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이 많은 양의 향료를 드렸던것입니다. 어떴습니까?. 과거에 이들은 예수님믿는 것을 숨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일이 터지자 남들은 모두 도망하는 순간에 오히려 용기있는 믿음이 이들에게 있었던것입니다. 이런 용기있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내 생각, 내 판단으로는 최악이요, 더 이상의 방법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용기있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최악의 순간에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최악의 순간을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회로 삼아 위기를 기회로…, 최악의 순간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인도하심이…, 영원하심이… 구체적인 응답으로 이루어지기를 부활승리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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