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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얻은 의 (창 1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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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꽃동네의 유래를 보니까 최귀동 할아버지라는 분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그 이름처럼 귀한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 강제 징용을 당하게 되었고 거기서 너무 배고프고 추워서 도망치다 붙잡혀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쫓겨났습니다. 결국 거의 폐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보니 그의 집은 망해서 다 흩어졌고 아내조차 어디론가 가고 아무도 그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 오갈데 없는 거지들이 사는 다리밑에 거처를 정하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정신질환에 고혈압 그리고 동상까지 겹쳐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리 밑의 다른 거지들과 어울려 살면서 힘없고 병들어 죽어가는 거지들을 위해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동냥이라면 돈이나 옷가지 등을 가리지 않는 다른 거지들과는 달리 그는 남은 밥만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또 그는 아이들이 뛰노는 장소에 버려져 있는 깨진 유리조각이나 사금파리같은 것들을 주워 모아 다른 곳에 갖다 버리곤 하였습니다.바로 그때, 동네 신부로 부임한 오옹진 신부가 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옹진 신부는 그를 보자마자 그의 허름한 모습에 빠져들어 꼼짝도 않고 서 있다가 뒤를 쫓아가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성당 뒷산 움막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거지들이 모여 살고 있는 움막이었습니다. 움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엔 참으로 기막힌 광경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뼈만 앙상한 폐결핵 환자, 영양실조로 서지를 못하는 아이, 알콜중독자 남편, 동냥조차 못하고 있는 불쌍한 거지가족이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그가 밥을 얻어다 먹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움막에서 나와 옆에 있는 움막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절룸발이, 정신질환자, 중풍걸린 노인 등 모두 열 여덟명이나 되는 걸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최귀동씨에 의해 하루하루 끼니를 연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밤 오옹진신부는 잠을 이루지 못한채 깨달은 진리는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가보니 최귀동씨는 동상으로 부어 터진 발을 회포대 종이와 새끼줄로 발을 칭칭 감고 있었습니다. 사정을 알고 보니 몸이 성치 않은데도 다른 걸인들을 위해 절뚝거리며 삼십여년동안이나 동냥을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오옹진신부에 의해 발견되어 의인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고(故)테레사 수녀가 성인 시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좀 특이했던 것은 카톨릭에서는 성인 한 사람에게 시호를 내릴 때는 5년 동안의 검증 기간을 거친 후에 시호를 내립니다. 그런데 그는 죽고나서 이례적으로 1년 만에 성녀로 추앙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의 애도를 받았습니다. 거지처럼 가난한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이 지상의 어떤 대통령이나 어떤 부자나 어떤 학자보다도 더 깊고 크고 넓은 애도를 받았습니다. 인종을 떠나서 또 종교를 떠나서 온 세상이 그 분의 죽음을 크게 애도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처럼 쉽게 성자 시호를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녀의 생애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참으로 의로운 인생이었습니다.그런가 하면 또 한 사람,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카톨릭 사제인 헨리 나우웬입니다. 이 분은 예일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던 훌륭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영혼의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이론과 학문이 장애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대학강단을 떠나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갔습니다. 정신박약 장애자 몇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살다가 61세, 많지 않은 일기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말 그의 글을 보면 참 깨끗하고 경건한 삶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이처럼 아름다운 생애를 살았던 삶을 우리들은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23)며 우리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존경에 마지않는 사람들 조차도 의인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신 첫번째 귀절을 만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6)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의롭다고 한 것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로 여기셨다는 이 말씀은 그의 행위를 의롭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멋진 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정든 땅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이 개혁에 진척이 별로 없는 것은 제각기 기득권을 안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께서 떠나라고 하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순종하고 자기 기득권을 쉽게 포기했습니다. 다시말하면 자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자랑할만한 일입니다.그런가하면 그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네 왕국의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수하에 하인 318명 밖에 없었습니다. 적의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믿음으로 밤에 급습해 연합군을 대패시킵니다. 그리고 모든 포로와 무수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얼마나 멋진 영웅적인 행위인지 모릅니다. 칭찬할만합니다. 자랑할만합니다.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더니 소돔왕이 마중 나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람이여, 당신이 가져온 전리품은 당신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으면 모두 빼앗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사람만 돌려주고 모든 전리품은 당신이 가지십시오.” 그러나 아브람은 No! 이기적으로 돈 버는 일을 안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합니다. 요즘은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시대입니다. 돈이면 형제도, 부모도 몰라보는 것이 이 시대의 풍토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정당하지 않은 돈을 갖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돈에서 승리한 사람을 얼마나 만날수 있을까요? 10만명 중의 한 두 명 만날까요? 100만명 중의 한 두 명 만날까요? 이렇게 칭찬할만한데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거기다가 그가 돌아왔더니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을 노래합니다. 저 같으면 그처럼 밤에 가서 애쓰고 수고했으니까, "아브라함이여, 당신은 위대한 장군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용감합니다"하면 더 기분이 좋을텐데 멜기세덱이 “이 모든 전쟁을 하나님께서 하셨다”하는데도 “아멘” 하면서 최초로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승리를 주셨습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겼다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말씀할 때 그는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 상급이시라면 내가 무자합니다.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다메섹의 엘리에셀이라는 내 집에 데리고 있는 하인을 상속자로 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씨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자 중에서 상속자로 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람을 데리고 들로 나가십니다. “네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라. 저 창공에 있는 무수한 별의 수효를 세어보아라.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그리고 그 때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6)아브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 것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을 뿐입니다. 성례로 사람을 깨끗케 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여호와를 믿음이니라”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믿는 것도 아니고 발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구체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높은 학문을 쌓은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높거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인격자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 자체가 신용이었습니다.(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봐라,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다메섹의 엘리에셀이 네 후손이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다”하는 말에 그는 아멘! 여호와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그를 의롭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몹시 불완전했습니다. 다음에도 보면 그가 곧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실패작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먼 훗날에 자기 아내에게 또 내 누이라 하라고 거짓말을 교사합니다. 앞으로도 그는 잘못을 합니다. 실수가 있습니다. 연약한 믿음입니다.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하고 연약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오늘 이 자리에 적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분 계십니까? 나는 어쩌면 이렇게 연약하게 믿는가? 내 믿음은 왜 이렇게 초라한가? 그래서 내게 구원이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분이 있으십니까?몸에 열이 납니다. 80된 할머니는 원래 힘이 없기 때문에 아스피린을 입에 넣을 때 손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입에 넣습니다. 젊은 청년은 아스피린을 힘차게 입에 집어 넣습니다. 그러면 힘들여 넣은 할머니의 아스피린은 효과가 없습니까? 무엇이 능력입니까? 아스피린 자체가 능력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데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소중합니다.이 믿음이란 말은 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대로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대로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이라도 됩니다. “너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적다고 할지라도 네가 이 산을 명해서 바다에 빠뜨리라고 하면 그리 될 것이요” 믿습니까? 우리 믿음에 힘이 있는 것 아닙니다. 약속의 하나님, 그 분이 능력이십니다.어느 날 여호와께서 애굽에 모든 처음 난 것은 다 죽이기로 약속한 밤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지나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대로 행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안될 일이 없어’하며 믿고 그 밤에 코를 드르렁 드르렁 거리며 잠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똑같이 양의 피를 발라놓고 잠을 좀 자려고 하면 주위 이 집, 저 집에서 우는 곡성 소리가 터지니까 잠을 못 자고 '아니, 이렇게 곡성 소리 많이 나는데 과연 그 죽음의 사자가 우리 집에는 안올까?' 하고 벌벌 떨며 한숨 못잤습니다. 그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집에는 그 피가 효력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똑같았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연약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약속이 너무 큽니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편만히 채워진다는 약속이 너무 거창합니까? 그렇습니다.크신 하나님이 크신 약속을 믿음의 사람 아브람에게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나는 작은데 그렇게 큰 약속이 내게 이루어질까요?’하고 반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자기에게 자격있는 것, 없는 것 생각지 않고 단순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했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실 때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그가 질문합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기업을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께서 자식의 숫자만 키워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 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9-11)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삼년 된 암염소, 삼년된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제물로 내놓고 그 가운데를 쪼개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중동 지방에서 맹세하는 방식입니다.너와 내가 이 약속을 절대로 지킨다고 맹세할 때 제물을 갖다놓고 쪼갰습니다. 만약 둘 중 하나가 이 약속을 파기하면 이 제물의 쪼개짐처럼 쪼개져야 된다, 죽음으로 대신해야 된다는 맹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죽음의 맹세를 아브람에게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그 맹세를 지켜서 제물들을 쪼개었는데 작은 새만 쪼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고 등장한 것은 솔개입니다. 죽은 동물을 먹기 위한 솔개가 계속 내려옵니다. 그는 하루 종일 그 새만 쫓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순종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의 임재의 영광을 보여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께서 곧 바로 실력을 행사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마음이 답답합니다. 마음이 곤고해집니다. 그러나 그 때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일을 기다려야 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약속을 믿고 인내하면서 그 시간들을 지내야 합니다. 아브람은 솔개를 쫓고 또 쫓습니다. 하나님 대신 방해꾼만 자꾸 나타납니다.그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첫 순종해서 교회 가려고 하면 왜 그렇게 교회 못가도록 막는 방해꾼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이 예수 믿고 나서 담배 안피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전에 담배가 집 안에 없어 밖에 나가 꽁초까지 얻어 피울 때는 그렇게 담배가 안생기더니 담배를 안피우기로 작정한 그 다음날 누가 고급담배 두갑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술 안먹기로 작정하니까 온 세상이 술 먹이려고 공짜 술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 순종한다고 갑자기 형통해지는 것 아닙니다.그 다음입니다. 해가 졌습니다. 아브람이 그 솔개를 쫓다가 밤이 되어서 지쳐서 잠을 자던 그 때 캄캄한 밤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그 때 말씀 하십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 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 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13-16) 나타나신 하나님은 엉뚱한 소리를 하십니다. 사백년 동안 후손들이 외국의 객이 되어 고통을 당할 것이고, 그 다음에 큰 민족을 이루어서 이 땅을 주겠다고,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이 심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내 때에 내 방법으로 이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축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이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로마서 5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1-5)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생애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영광이 우리 속에 온전해지기 위해서 우리의 껍질을 깨는 환난이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옥동자를 낳기 위해서 산고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생애 진정으로 좋은 것은 아픔이 없이 오지 않습니다. 그냥 형통해서 바른 인격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냥 승승장구하는 사람 쳐놓고 교만의 시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 살면서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지 않고 위대한 사람이 된 경우는 역사상 한 사람도 없습니다.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환난이 있습니까? 아파서 지난 간밤에도 부여잡고 잠을 못이루셨습니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승 장구로 그냥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백년 동안 기나긴 고통이 터널을 지나 저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표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기대가 있습니다. 걸작이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빚으시는 과정에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돌맹이 하나가 미켈란젤로의 정을 맞기 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돌맹이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정을 맞을 때마다 그 돌맹이는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 빛나는 다윗의 모습이 그 돌맹이에서 튀어나온단 말입니다. 고통을 통과한 다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이 땅에 후손들이 편만히 채워져서 돌아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17절입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원래 맹세할 때 너와 내가 동등한 맹세를 했으면 같이 그 제물 사이에 서서 맹세하고 약속해야 됩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폼잡고 서 있을 때는 나타나시지 않다가 그가 잠잘 때 그를 깨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아브람 둘이 함께 서서 동등하게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십니다. 그 타는 횃불이 그 쪼갠 제물 사이를 통과합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 하마’입니다. 성경에 약속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뜻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너와 내가 동등하게 맺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경에는 일방적으로 홀로 맺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실 때는 일방적으로 약속하십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 양쪽의 합의하에 함께 서명해서 약속하지 않는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구요?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약속을 잘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약속하는 약속은 대부분 일방적입니다. 자식이 “아빠, 나 대학보내줘”해서 대학 보냅니까? 아니지요. 아버지 마음 속에 결심이 섭니다.내가 너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을 보내리라. 심지어는 자격이 안되어도 보냅니다.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성실하게 지켜집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십니다. 그와 대면해서 얼굴로 얼굴을 보면서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이것을 줄께’가 아닙니다.‘내가 너를 택하여 불렀고 내가 너에게 승리를 주었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이 땅에 편만히 채우겠고 큰 민족을 만들 어서 동서남북 사면에 네 후손으로 가득 채우겠다, 잠시 고통을 당하겠지만 그 고통이 네 후손들이 이 땅에 편만히 되는 도구가 될 것이다. 내가 그것을 이루겠다. 내 죽음으로, 내 목숨을 두고 이 일을 성취하리라’고 약속하시며 타는 횃불로 그 쪼개진 제물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셨습니다. 도무지 될 수 없었던 가정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역사상 단한번의 예외, 노예 민족이 스스로 그 노예의 결박을 풀고 자유민이 된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이 세계 역사상 유일한 역사,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어떤 노예 전쟁도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천 칠백년 전에 우리에게 위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 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이천 칠백년 전입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이 땅에 죄 때문에 죽어져가는 모든 인생을 향해서 구원을 베풀겠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너희 스스로가 아니라 여호와 내가 너희 속에 찾아가겠다, 너희를 돕겠다’고 말합니다. 인생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이사야가 말한 뒤 칠백년 후, 갈보리 언덕에 그 분은 양 팔이 못에 박힌 채 그 가슴이 로마 군병의 창에 찔린 채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 목숨을 버렸노라. 죽음으로 내가 그 약속을 지켰노라” 그 분이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을 당하시며 마지막으로 선언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 분은 나를 대신해서 갈보리 언덕에서 양 손이 벌려진 채 그 가슴에 깊은 창자국을 내어놓은 채 죽음의 제물이 되셨습니다.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 이 구원의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가 형벌 당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 분이 담당했다면 나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무죄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아무리 깊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물되어 죽으신 그 주님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이고 갈라디아서입니다. 내 모든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졌습니다.나는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내가 죄를 지었지만 의로운 상태로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고 내 죄의 형벌만 전가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기셨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도 돈을 벌 수는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도 형통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도 지혜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되는 것 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가지 않고는 해결이 안됩니다. 여기 구원이 있습니다.주께서 친히 다 해놓고 나에게 믿으라고만 합니다. 주께서 선물 포장을 다 해놓고 ‘너는 받기만 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미는 손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소중한 것 아닙니다. 그 선물이 소중합니다. 전가된 그리스도의 새 삶이 그 다음부터 놀랍게 내 생애 속에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 완성하신 주님의 구원을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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