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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즐기세요 (수 24:14-18; 요 06: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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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명절을 잘 보내셨는지요? 성도님들의 얼굴들을 보니 기쁘게 며칠을 지낸것이 들어 납니다. 오랜만에 보고싶었던 가족들의 얼굴도 보시고, 또 만나서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속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모두 풀어 놓았으니 얼마나 시원하십니까? 흡족한 표정이 역역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이 충만하셨을 것입니다.은 받았으나 또 다른 힘들에 의하여 남북이 갈라져서 지금까지 지내오는 것을 생각하면 광복절의 의미가 별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서 기뻐하시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한번 헤아려 보셨습니까?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1조를 여러분들은 거의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문:"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대답:"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쁘시게하는 것입니다."가족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는 기쁨과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내용이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의 영어 번역에는 "enjoy him"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단어는 우리들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을 만나서 기뻐하고 즐기는 것의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엔조이한다" 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말이 되었을 정도로 흔하게 쓰여지고 있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엔조이 하십니까? 하나님을 단순히 믿는 차원을 넘어 서서 하나님을 엔조이 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구상에서 제일 즐겁게, 기쁘게 사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생명을 얻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얻고 배고프지 않는 만나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자는 하나님을 본자"라고 선언하시면서 창조주요 구원자인 예수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슬퍼하는 자들을 찾아서 기쁨을 주었고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슬프고 괴로운 삶을 밝고 맑게 변화시켜서 삶을 엔조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종교가 엔조이가 아니고 짐이되고 고통이 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듯 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이(함께 계심) 삶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무서움이나 우울한 것이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마치 법률책 처럼 여기는 사람들, 교회는 마치 재판하는 법원 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유와 감사와 기쁨이 아니고 반대로 겁나고 두렵고 짐이 되는 것으로 종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139편에도 그런 사람을 봅니다:"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오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오리이까" 물론 이 시인의 결론은 아무리 피해보아야 갈데가 없다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옆에 계시는 것을 즐기고 그를 엔조이하지를 못하고 반대로 부담이 되고 두려움이 되어 도망을 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늘로 가도 소용이 없고 음부로 내려가더라도 소용이 없고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어디나 현존하신다" 라고 읊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거북스럽습니까? 전혀 기쁘지 않습니까? 옆에 싫은 사람이 앉아있는 것 처럼요?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람의 제일의 목적, 최고의 목적을 상실한 증거입니다. 교회의 생활이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고 억지로, 마지 못해 이어진다면 심각합니다. 어떤분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교회에 오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에 아니 가면 하나님께서 야단을 치실까봐 마지못해서 예배당으로 발길을 돌리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에게는 하나님은 엔조이하는 대상은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그를 즐기지 못한다면 되겠습니까? 종종 사고가 나거나 병이 나거나 하면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살았다면 하나님을 엔조이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엔조이하면서 산 성도는 어떤 경우를 만났어도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뒤집어 해석하면 하나님을 엔조이하지 못한 까닭에 조금만 잘못되어도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서는 도망가고 숨었던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즐거워했다면 전혀 그런 자책감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도망가고 숨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엔조이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의 노예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해방을 받아 본 교향으로 향할 때 저들은 그 하나님을 정말로 엔조이했습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했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데 시간이 흐를 수록 그를 떠났고 멀리했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배역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간에도 종종 야단을 쳤습니다. 저들 백성들이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겠다" "밥이 없어서 배고파 죽겠다" 라고 원망할 때도 꾹꾹 참고 도와주셨던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마치 자기네들을 애굽에서 구해준 신처럼 섬길 때에는 대노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경고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엔조이 할것을 권유했습니다. 오늘의 구약의 본문에서도 보면 여호수가가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에 "이제는 다른 신을 엔조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그를 엔조이하라" 라고 유언했습니다.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부 후손들은 다른 신을 검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이 점점 발전하여 마지막에는 율법주의 종교로 굳어졌고 아주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즐기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참지를 못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심에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을 다시 하였습니다. 새 계약은 곧 사랑의 계약입니다. 율법을 파기하시고 과거의 죄는 모두 도말시키시고 새로운 계약읖 체결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로서 서로 즐기면서 살도록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서 바울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묘사한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본문은 결혼주례시에 자주 봉독 하는 말씀이지만 바울이 32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밝혔듯이 이 본문의 기록 목적은 결혼 주례사에 써 먹게 하시려고 쓰신 것이 아니고 성도들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엔조이하는 관계를 강조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엔조이하되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엔조이 하듯이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이토록 사랑으로 서로를 즐기고 엔조이하는 관계가 되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엔조이하는 길은 어떤 것인가요? 첫째는 하나님을 즐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만나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1;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외아들이 하나님을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무섭고 두려운 신일 뿐입니다. 종종 우주의 신비를 생각하다보면 나의 존재가 너무나 초라하고 나의 삶이 너무나 무의미한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수억년의 광년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떠올리면 현기증이 납니다. 너무나 미미한 지구와 그 가운데의 개미와 같은 작은 인간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이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때 이 인간들을 위하여 자기의 유일한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독생자가 바로 나를 위하여 이 지구촌에 오셨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하나님이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나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의 잘못들을 모두 용서하셨음을 알게되는 순간 나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눈물을 아니 흘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15세에 처음 깨닫는 순간에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나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내가 친근히 하고 나의 아픔과 슬픔을 이야기 하고 내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아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을 엔조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더러 "나를 본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저주하고 벌주고 야단치실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도와주고 구원하고 치료하고 구원하려고 오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엔존이 하셔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즐기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집에 가시자 마자 당장 복음서를 열어서 읽어 보세요.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차근 차근 읽어보세요.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친구입니다. 그는 죄인들을 미워하시기 전에 불쌍한 마음으로 감싸주실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읽으세요. 그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보세요. 여러분의 하나 님은 눈물과 아픔이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십자가의 처형으로 죽으신 예수를 보세요. 여러분들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이제 얼마후에는 세례 문답을 합니다. 반드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정답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며누리를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우리 전체를 위해서?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을 사람 그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엔조이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두번쩨로 하나님을 엔조이하는 방법은 새로운 접근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로 다가 서는 길은 은혜에 기초하여야합니다. 은혜란 무조건적인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엎드리는 자에게 사랑으로 감싸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주입니다. 은혜에 기초하여 하나님께 접근하면 하나님을 엔조이할 수 있습니다. 육을 가진 인생들이 이 땅을 살다보면 어쩌다 잘못을 알게 모르게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도망가고 숨어버릴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먼저 떠 올리고 그분에게 나아가서 사죄하는 것입니다. 통곡을 하면서 잘못을 빌면 하나님은 모두 용서해주십니다. 죄를 아니 짓는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그때 두려움의 하나님을 생각마시고 은혜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은혜의 하나님을 엔조이 하는 길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을 엔조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자들의 생각속에는 하나님이 자기 뒤를 항상 밟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을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서 여러분이 무슨 짓을 하는가 몰래 몰래 여러분의 뒤를 밟아 가시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을 즐기지 못하지요. 대통령의 가족들이 아주 싫어하는 것이 경호원들이라지요. 계속 뒤만 쫓아 다니니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여러분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을 아주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려면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뒤따라 오게하지 마시고 아야 하나님을 여러분의 마음 한 가운데 모시시 바랍니다. 그러면 완전한 하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는 든든합니다. 늘 나와 함께 계시니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이라고 고린도전서 3: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안에 하나님이 거하게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지니고 다니는 셈이 됩니다. 금가락지를 손가락에 끼어야 즐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즐거움의 대상입니다. 엔조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육화되었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즐기세요.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은혜에 기초하여 사십시요. 율법에 기초하지 마세요. 율법은 항상 우리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 한가운데 모시기 바랍니다. 뒤따르게 마시고요. 하나님을 엔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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