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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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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히12:1-3)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1-3>사람이 집에서 기르는 가축 가운데 사람과 아주 친근한 짐승이 있다면 개입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면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의 구유를 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잘 알아보기로 말한다면 개를 따라갈 짐승이 없습니다. 개는 멀리서도 자기 주인의 음성을 분별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주인의 발자국을 알아 듣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만나면 꼬리를 치면서 반갑게 맞이하고 가까이 와서 혀로 핥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개가 좋아서 개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런데 개 중에도 영리한 개가 있습니다. 진돗개나 세파트 같은 개는 아주 영리합니다. 이런 개를 주인이 훈련시킬 때, 주인이 허락하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훈련시킵니다. 주인이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한 장소에 갖다 놓고 지켜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개가 날쌔게 뛰어가서 그것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때 주인이 안돼! 하고 소리를 지르면 멈칫 하고 섭니다. 주인은 고기를 빼앗아갑니다. 그 다음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고기를 갖다 놓으면 또 개가 접근합니다. 그때 안돼! 하고 또 소리 지르면서 개를 가볍게 때려줍니다. 그렇게 한 세번 정도만 반복해서 훈련시키면 그 다음에는 고기를 갖다 놔도 고기를 보기 전에 주인부터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주인이 먹으라고 하는지 안 된다고 하는지 눈치를 살핍니다. 개는 그렇게 해서 길들여집니다. 하물며 개도 이렇게 길들여지는데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안 되는 것과 되는 것, 허락하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면 성경안에 있는 무수한 복들이 그에게 주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주인되신 주님을 먼저 바라보고 주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귀담아 들은 뒤에 어떤 말도 하고, 어떤 행실도 할 때 이런 사람을 가리켜 자기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히 12:2절에 있는 말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을 중심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의 운동장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여정을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 양 옆 스탠드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경주하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경기하는 선수가 법대로 경기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있는 심판도 있고, 선수들을 관리 감독하는 감독님도 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운동장에서 달리는 경주자들로 말하면서 히브리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으로 승리했던 신앙의 위인들을 수없이 많이 등장시키면서 12장에 와서 그들이 지금 구름처럼 허다한 무리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먼저간 신앙의 선진들, 위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주님 중심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음의 주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믿음의 창시자, 믿는 자에게서 본을 보여 앞서가시는 분,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주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방법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라본다는 말은 시선을 집중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려고 하면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저희 딸이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재수를 했습니다. 재수할 때 어느 한 교수님이 저희 딸을 지도해 주었는데 그 때 우리 딸에게 한 말을 제가 기억합니다. 네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려면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처럼 되어야 한다.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은 옆을 보지 못하도록 눈가리개를 하고 앞만 볼 수 있도록 해서 달리는데 네가 일년동안 좌우를 살피지 말고 오직 네가 원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해라. 그래서 우리 딸은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들었고, 일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만 향해야 합니다. 해바라기라고 하는 꽃은 해만 따라다닌다고 하여 해바라기지만 우리는 주님만 바라본다고 해서 주바라기가 되어야 합니다.누가 칭찬을 좀 한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교만에 빠지는 사람, 누가 책망 한 마디 한다고 해서 삐죽하고 시험드는 그렇게 약하고 좌우로 치우치는 사람은 어떤 큰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우리 인생은 모태에서 출생한 후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쉬지않고 달리는 경주자들인데 마라톤 선수는 목표 지점까지 4

2.195km를 달립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여정은 어떤 이는 80년을 달리고, 어떤 이는 70년, 어떤 이는 50년을 달리고,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20년도 채 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첫째는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구속하셨습니다.두번째는 이 험악한 죄악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언제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찬미하며 사랑하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 목적, 세번째는 우리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받은 날 곧바로 천국에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우리를 머물러 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같이 선하신 하나님의 의지, 선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에게 달려가야 되는데, 즉 예수님을 본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첫번째,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히 12: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달리기 선수에게 있어서는 가능하면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속옷 입고, 겉옷 입고, 외투까지 입고 달리기하는 선수 봤습니까? 없습니다. 다 벗어 던집니다. 심지어 수영선수와 달리기 선수는 기다란 머리카락까지도 방해가 된다고 해서 짧게 잘라 버립니다. 어떻게 하든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무겁게 만들고 붙들고 전진하지 못하도록 앉은뱅이처럼 살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첫째는 욕심이라고 하는 죄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습니다. 욕심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는 다릅니다. 먹고 싶다, 그것은 욕심이 아니라 본능입니다. 그런데 욕심이란 하나님이 금한 것까지 자기가 갖겠다 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그 곳에서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거기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고 여러 실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임의로 먹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한 것이 있고 금한 것이 있습니다. 금한 것을 취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사탄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그것을 바라본즉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 보인지라 그것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 아담에게도 주니 함께 먹은지라.즉 하나님이 금한 것을 취했습니다. 그것은 욕심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부유하고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을 부리다가 이미 준 것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약 1:14절 이하에 우리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모든 날들에 열심히 일하라, 그러나 주의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주를 찬양하고, 잃은 양 찾고, 병든 양 돌아보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내 영성을 강화하는데 구별되게 지키라고 했는데 주일날까지도 자기 날로 삼으면 욕심입니다.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는데 십분의 일까지도 취했다, 욕심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허락한 것은 임의로 할 수 있지만 금한 것을 가졌다, 욕심입니다. 욕심이라는 죄에 붙들리는 사람은 이십년동안 신앙생활해도 축복과는 상관이 없고 늘 곤고합니다. 두번째 벗어 던져야 할 무서운 죄는 자기 교만입니다. 자기 교만이라는 말은 자기 생각대로 믿는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따로 만들어놓고 믿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는 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로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아야 되고, 아래로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바로 합시다 그러면 내 믿음은 내가 지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말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긍정적일 수 있지만 잘못하면 나 간섭하지 마세요, 그런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내 믿음은 내가 지킨다, 교만한 말입니다. 내 믿음 내가 못 지킵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셔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붙들어 주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끌어주어야 합니다.베드로가 자기 믿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끝까지 주를 따르겠나이다. 자기 믿음 자기가 지켜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했습니다.주님이 서야 할 자리가 내가 서면 교만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니 주님 도와 주세요, 그래야 주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면 되었지, 뭐 사람들이야 나를 어떻게 인정하든 상관없다, 아닙니다. 그것도 교만한 말입니다. 그것도 성경적으로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여러분이 아무리 신앙양심앞에 거리낌이 없어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 중심인데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거리낌이 없어야 됩니다.그래서 마 18:18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5:23절 이하 말씀에서도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바라서면 된다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바울은 롬 14:18절에서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교회의 집사를 세울 때 하나님 앞에 바로 섬으로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이 충만하고 믿어지는 믿음을 주셔서 믿음이 충만하고 분별하는 지혜를 주신 사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을 택하라고 그랬습니다.그러니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하고, 사람들로부터도 그는 진실로 믿음의 사람이며, 사랑의 사람이며, 소망의 사람이고 꼭 필요한 사람이고, 참 좋은 분이라고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심지어 마귀에게서도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 사람은 손댈 수 없어, 무서워,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니 그 사람은 도저히 우리가 해볼 사람이 아니야 하고 세상, 즉 마귀가 감당할 수 없는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히 13: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대하 20:20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욥 22: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히 12: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과도 화목해야 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도 화목하고 신의가 있고, 의리가 있고, 거기에 사랑의 관계가 이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바로 서지 못하고 범사는 맺혀 있고, 마음과 몸은 병들어 있는데 그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 중심으로 예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해야 되는데 아직도 자기 중심으로, 사람 중심으로 육신의 생각을 따르니 입으로는 주님을 섬기지만 내용으로 볼 때는 자기가 중심이니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마 7:21절 이하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그래서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시험이 있을 때 보면, 반석위의 신앙인지,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꼭 주님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기를 바랍니다.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습니까?히 5:7절 이하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단 한번도 하나님 말씀앞에 아니오 한 일이 없었다. 언제나 예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하나님 앞에서 고집부리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고집, 교만은 어디에서부터 생겨나겠습니까? 무지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모르면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지 않고 듣지를 못해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자기가 속기도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됨으로써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성경말씀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케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를 들추어내는 것은 말씀입니다. 엑스광선이라는 빛은 사람 몸 속에 있는 모든 사실을 들추어내는 빛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이 우리 속에 비추어 오게 될 때 내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사람이 얼굴을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되는 것처럼 자기 심령을 보려면 말씀앞에 서야 되는데,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면서 자기 모습을 밝히 봐야합니다. 그래야 죄를 회개할 수도 있고 힘을 얻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인지 금한 것인지 분별력도 얻을 수 있습니다.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은 성경 말씀밖에 없습니다. 불량하고 술에 빠져 살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눈물을 짓게 했던 어거스틴이라는 청년이 어느 날 롬 13:11절 이하를 읽다가 찔림을 받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다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그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곡하고 울면서 지난 날의 과거를 청산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니 기독교 2천년 역사의 큰 별, 성자 어거스틴으로 변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새로워지려면 옛날부터 지으면서 살아온 죄악을 던져야 됩니다. 회개없는 믿음, 회개없는 천국, 회개없는 성령체험, 회개없는 병치료, 회개없는 축복은 없습니다.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깨닫고 고치는 것입니다. 뉘우치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 사람은 회만 하고 개를 안 한 것입니다. 회(悔)자가 뉘우칠 회, 개(改)는 고칠 개입니다. 그러므로 뉘우치기만 해서는 안되고 고쳐야 합니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그 성령은 평화의 신이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근심 걱정은 다 사라집니다.성령은 권능의 신이기 때문에 새 힘을 얻게 합니다. 지혜의 신이기 때문에 분별력을 얻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데 누가 그를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약해 보여도 하나님의 성령에 붙들린 자는 강한 자요 조금은 모자라 보여도 하나님의 성령에 붙들리면 지혜가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가진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멸시받고 천대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성령충만 받으면 귀하게 쓰임을 받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이제 욕심이라고 하는 죄와 자기 교만이라고 하는 무거운 죄를 벗어 던져 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계속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어떤 사람은 그동안에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발끝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사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오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원망이나 하고 불평이나 하고 죄를 지으니 너희가 매를 맞지 않았느냐?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되었구나.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물러가서 고집부리고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회개하며 돌아오면 내가 너희를 찢었으나 다시 싸매어 줄 것이고 하나님이 징계하였으나 하나님이 치료해 준다고 말씀합니다.사는 길이 한 가지 있습니다. 회개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이 매를 맞을 때는 금방 아프고 쓰리지만 그것때문에 깨닫고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면 주님은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세번째,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리기 위해서는 꿈과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고난을 인내해야 됩니다.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라고 했습니다. 뭐가 즐겁습니까? 삼일만 지나면 아버지가 날 부활시킨다, 그것을 믿었습니다. 뭐가 즐겁습니까? 내가 이렇게 십자가를 짐으로 천하만민이 구원받게 되었다, 그것이 즐거웠습니다. 뭐가 즐거웠습니까?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난 이후에 난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준다, 지금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미리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사람은 소망이 있을 때 인내할 수 있고, 희망이 있을 때 노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꿈이 있어야 됩니다. 부활의 꿈, 다시 산다는 꿈, 부활절을 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원래 이 부활, 이스터라는 말은 봄의 여신을 지칭하는 오이스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따뜻한 햇빛이 쪼이면서 엄동설한속에서 잠자던 생명들이 약동하고 땅속에 숨어있는 생명들이 새 움을 돋는 봄처럼, 부활이란 말은 새로운 소망, 희망이란 뜻입니다.절망에 처한 사람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소망의 사람으로 바뀌어 집니다. 약했던 사람도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도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새생명을 얻기만 하면 변하여 새사람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상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이 십자가 고난과 수치를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영광이 온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나와 복음을 위해서 이 수치와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하기만 하면 금세에서 백배의 복을 받게 되고 내세의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해를 입은 여자가 아이를 배서 해산하게 될 때 애써서 부르짖더라. 그리고 아이를 낳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를 입은 여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은혜받은 성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가 된다면, 성도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도라면 해를 입은 여자처럼 아이를 낳기 위해서 애써 부르짖어야 됩니다. 전도하기 위하여 열심히 부르짖어야 됩니다. 한 영혼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됩니다. 한 영혼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여인이 10개월동안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고생했고, 그 아이를 출산하는 그 순간만큼은 죽을 힘 다해서 쓰리고 아픈 고통을 경험하면서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전도한다는 것은 애를 낳는다는 것과 꼭 같습니다. 전도대상을 마음에 가졌다, 그것은 이미 임신한 여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결정적으로 해야 된다, 그 때는 부르짖는 여인처럼, 산실에서 부르짖는 산모처럼 부르짖어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새생명을 얻게 되는 날, 그 때에 그 쓰리고 아팠던 해산의 고통을 통해 태어난 아이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도 많이 하는 사람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교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교회를 사랑합니다. 전도에 경험이 없다, 애를 낳아본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애를 귀하게 알겠습니까? 애를 낳아서 길러봐야 이 아이가 오늘까지 어떤 과정을 경험했는지 본인이 알기 때문에 그냥 잘났든 못났든 내 자식이 좋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자식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투자를 해야 관심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경주에서는 일등을 해야 면류관을 주지만 천국에서는 일등만 면류관을 주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끝까지 들어오기만 하면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딤후 4:7에 나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끝까지 경주하십시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가는 것만 못합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졌으면 힘껏 달리십시오. 4

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는 체력도 필요하지만 정신력도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끈기가 있어야 됩니다. 인내가 있어야 됩니다. 중도에서 포기하는 마라톤 선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들, 천국에서는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주실 줄 믿습니다.마 24:13절에 말세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은혜가 있을지어다.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복 주십니다. 욥의 인내를 듣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을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참아보십시오. 좌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3절 말씀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으니 그 분을 생각하라.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이 2절에 나오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3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아예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시고 아예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주님이 가시면 함께 가시고, 빌라도의 뜰에 서시면 함께 가시고, 갈보리산 올라가면 함께 올라가십시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부활의 아침에 만나 주시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안타까운 것은 그런 수치와 고난의 자리는 빠지려고 하고 영광의 부활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십자가 지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전제조건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따라가는데 어떻게 고난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복음 전하는데 수치가 없겠습니까? 그것만 바라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삼일만 지나면 부활한다, 승천한다, 마귀는 항복할 것이고, 천사는 옹위할 것이며, 천하만민은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 즐거움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말고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고난의 언덕을 뛰어넘으시길 바랍니다.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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