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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의 순교와 교회의 기도 (행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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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했으며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합니다. “손을 들어”라고 했는데 “포악한 손을 들어”라고 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헤롯왕은 정확히 말하자면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가 왜 그리스도인들을 해하려 했는지 본문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헤롯이 예루살렘 교회를 포악하게 내려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는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대 헤롯의 손자입니다. 아그립바가 네 살 때이던 주전 7년 그의 아버지 아리스도불로는 그의 할아버지 대 헤롯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그가 왕권을 찬탈하려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였습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그립바는 어린 나이에 로마로 보내졌고 거기서 로마의 최고위 황족의 자녀들과 함께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 중 둘만 예로 든다면 가이오와 글라우디오입니다. 이 둘은 나중에 차례차례 로마의 황제들이 된 자들입니다. 이때 아그립바가 그들과 맺은 교제관계가 훗날 그로 하여금 그의 할아버지 대 헤롯처럼 유대 왕국을 다스리게 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주후 37년에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된 가이오는 아그립바에게 왕의 칭호를 주고 전에 아그립바의 삼촌 빌립이 다스리던 영토인 요단 동편과 갈릴리 북쪽의 열 도시 즉 데가볼리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칼리굴라는 또 39년에는 아그립바의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디바를 유배 보내고는 그가 다스리던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아그립바에게 줌으로써 그의 영토를 확장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41년에 칼리굴라가 죽고 로마의 새 황제가 된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에게 35년간 로마총독의 통치 하에 있던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 대 헤롯 때의 영토와 맞먹는 영토에서 모든 유대인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그립바는 자신의 신변에 대해 안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칼리굴라 황제와의 교분 덕택이었는데 로마인들이 칼리굴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그립바는 언제까지나 로마의 호의를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그립바는 그의 영토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유대인 신하들로부터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는 유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특히 영향력이 강한 바리새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시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헤롯이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몇 사람을 잡아 죽이려 했고 첫 번째로 사도 야고보를 죽인 것도 그런 시도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이 전하는 바대로 유대인들은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본 아그립바는 또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했습니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게 했다는 것은 감방 안에서 두 병사가 베드로의 양옆에서 쇠사슬로 베드로의 양손을 각각 자기들의 손에 같이 묶고 감방 문밖에는 두 병사가 지키는데 이렇게 네 명씩 한 조로 편성된 감시조가 여섯 시간씩 4교대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 바로 뒤에 오는 6절에서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라고 한 것은 바로 그 감시방법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최고로 엄중한 밀착감시였습니다. 아마도 아그립바는 베드로가 전에도 옥에 갇힌 적이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옥문을 열고 나온 사실(행5:18-19)을 알고 있었기에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이런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베드로를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한 것 같이 베드로를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다 공개재판을 하고 처형하려 했음을 의미합니다. 열두 사도들 중에서도 지도자이며 대변인인 베드로를 유대인들 손에 내주고 처형함으로써 계속해서 그들의 환심과 지지를 유지하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무슨 비행을 저질렀습니까? 아무런 비행도 잘못도 없습니다. 무슨 소요를 일으킨 일도 없었습니다. 사도들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라곤 많은 이적기사뿐이었습니다(행2:43, 5:12). 눈속임으로 백성을 현혹시키는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잡아 일으켜 걷고 뛰게 해주었습니다(행3:1-10). 그래서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환자들에게 덮이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행5:15). 또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혀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행5:16). 예루살렘 교회는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습니다(행2:47, 5:13). 그런데 어려움에 처하고 고통 받는 민간에게 치유와 선행을 힘쓰던 예루살렘 교회가 세속 권력자와 유대교 고위지도층의 정치적 이해타산과 야합의 결과로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칼로 살해를 당하고 베드로도 붙잡혀 엄중한 감시 아래 임박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순절 성령강림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예루살렘 교회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야고보는 희생을 당하고 말았지만 아직 옥에 갇힌 채 살아있는 사도 베드로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본문 5절). 그 기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 죽이려고 하던 날 전날 밤에 베드로는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고 있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행12:6). 그런데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을 벗겨주고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우며 일어나게 했습니다(행12:7). 그 천사는 베드로로 하여금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게 하고는 따라오라 했습니다(행12:8). 베드로는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 줄로 여기며 천사를 따라갔습니다(행12:9). 여러 겹으로 파수꾼들이 있었지만 천사가 베드로를 데리고 지나갈 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고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자 문이 저절로 열렸으며 시내로 나와 거리 하나를 지나자 천사는 떠나고 베드로는 동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행12:10). 그리고 헤롯에 의한 야고보의 순교를 알리며 시작된 사도행전 12장은 그 끝부분에서 바로 그 헤롯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옛날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처했던 위기상황과 비슷한 한 가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반정부 무장세력인 탈레반이 한국교회의 자원봉사단원들을 납치하고 열하루 째 억류하고 있으며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그 “포악한 손을 들어” 인솔자였던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억류하고 있는 22명의 생명을 위협하며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나라의 민간에 너무나 선하고 필요한 봉사의 활동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어린아이들에게 의수와 의족을 달아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입니다. 그들의 의술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비참한 처지에서 절망에 빠져있던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위험한 지역인지 모르고 간 것이 아닙니다. 위험하다고 해서 아무도 안 간다면 그 불쌍한 아이들은 어찌 되겠느냐며 애끓는 마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들을 인솔했다가 무참히 살해당한 배형규 목사는 정말로 보기 드문 귀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친 수천 명의 학생들 가운데 가장 신뢰하고 아끼며 크게 기대를 걸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확고한 신앙과 반듯하고 깊이 있는 신학적 사고와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과 청년들을 위한 열정과 헌신으로 다져진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4년 내내 전액장학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장신대에서는 제가 졸업논문을 지도했기에 잘 알지만 신학공부 또한 잘 할 뿐 아니라 바르게 한 목사입니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단원들을 이끌고 간 것은 결코 영웅심에서가 아닙니다. 평소에 대단히 신중하고 청년들에 대해 세심한 염려를 기울이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20여년 오로지 청년들을 위한 사역에 전념해왔습니다. 그는 어렵고 힘들어 보통 남들이 가려하지 않는 곳들을 찾아다니던 그의 소명감 때문에 이번에도 아프가니스탄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 또 아프리카 우간다로 봉사활동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은 희귀성 폐질환을 앓아 몇 년 전 1년간의 요양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도 식을 줄 모르는 그의 봉사의 사명감이 그를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그가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할 곳인 줄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감히 배형규 목사를 순교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귀한 인물을 그 젊은 나이에 그 험한 곳에서 참혹하게 죽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사람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이제 그곳 아프가니스탄에도 복음의 계절이 오기 위해서 순교의 피가 흘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배형규 목사를 택하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가장 강퍅한 무장세력 탈레반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이기에 가장 정결하고 흠없는 희생의 제물이 필요했고 그래서 온유겸손하고 깨끗한 배형규 목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골라 쓰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배형규 목사의 순교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아니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어딘가에서 반드시 배형규 목사가 흘린 순교의 피가 복음의 씨가 되어 아름답게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자원봉사자들이 보다 신중하게 움직이지 못한 면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함부로 비난하고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으며 납치범들을 자극해서 그들의 생명을 구해내려는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온갖 언행을 서슴치 않는 무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를 잃고 베드로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가 한 일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최우선으로는 아직 억류 중에 있는 나머지 스물두 명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최대한 빨리 풀려나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을 붙들고 있는 탈레반 병사들의 감시가 철통같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기적같이 베드로를 풀려나게 하셨듯이 그들을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 극심한 불안상태 속에서도 또렷한 의식과 끝까지 버티려는 의지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희생이 된 배형규 목사의 온 가족에게 그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소망과 위로와 용기를 하나님께서 충만히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가족들뿐 아니라 그를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이들이 그의 몫까지 더 잘 감당하려는 다짐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23명의 봉사의 손길과 그들이 흘린 땀방울들과 배형규 목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이 그 끝없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며 오랜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빨리 치유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야고보 이전의 예루살렘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이 순교할 때 어떤 기도를 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스데반은 사람들이 돌로 자기를 치기 시작하자 무릎을 꿇고 크게 외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는 눈을 감았습니다(행7:59-60). 또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의 기도가 또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우리의 자원봉사자들을 납치하고 살해하여 피랍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우리 온 국민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주고 있는 자들이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맙시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기도합시다. 그들이 포악한 손을 들어 얼마나 고귀한 사람을 죽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며 참회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그들과 그 나라 백성이 복음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아프가니스탄이 평화롭고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 되도록 기도합시다. 전쟁의 참화를 당하고 고통 속에 사는 모든 이들이 위로 받고 치유 받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서 그 땅을 뒤덮고 있는 증오가 걷히고 사랑이 피어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것이 23명의 자원봉사단원들이 원했고 기도하며 실천하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 전체가 그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 하나님의 종의 순교가 교회 전체의 기도로 이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역사하시리라 믿습니다. 큰 슬픔을 당한 한국교회와 온 그리스도인들 위에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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