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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통(通)’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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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드 스위트 교수

지난해 4월 미래 교회 연구의 오랜 동반자인 김영래 감신대 교수를 통해 한국의 성경통독 전문가 조병호 목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동서 교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나누면서 나는 한국어의 ‘통(通)’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이 ‘전체·조화·연결·궁극적 관계 형성’을 뜻한다는 것과 바로 이 통이 21세기 교회의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왜 통이어야 하는가. 오래 전 일이다. 한 청소년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 아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질문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올바른 질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내 아들이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을 체험(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줬다.

이제껏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생각)로 믿는 데 집중해왔다. 만일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깨달음’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든, 이를 선포하는 목회자의 설교든 이성적 깨달음이 우리를 구원과 영적 성숙으로 이끈다고 믿어왔다. 이런 표현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들음에서 깨달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은 삶을 변화시키는 근거와 동기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이와 함께 와야 할 체험, 즉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심정적 영적 관계의 형성 없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시인할 수 있을까.

이제 머리와 가슴은 통해야 한다. 이성은 감성과 통해야 한다. 서양과 동양은 통해야 한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는 통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는 통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이중고리 또는 이중종소리라고 불렀다. 이 말은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 상반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는 소위 포스트모던이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대상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과거의 위계적 질서는 다양성이라는 수평적 관계로 변화하고,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이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그래서 대형교회가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소집단을 원한다. 사람들은 대중 속에 묻혀 사생활을 보장받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직접적 참여와 기여를 원한다. 젊은이들은 열린 예배의 친밀감을 원하지만 동시에 전통적 예배의 성스러움을 갈망한다.

서로 상반돼 보이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중고리, 이중종소리의 상황과 현실은 바로 통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돼 하늘과 땅 사이의 장막을 찢어놓았듯 우리도 서로 다른 것에 대한 반목이나 배척이 아니라 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 통을 통해 한 개체로는 작고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거대한 영향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통하는 교회가 21세기의 희망이 되길 바란다

(번역=스피릿벤처미니스트리스코리아 대표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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