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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와 격려 (사 6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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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책망하시고 경고하셨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잘못한 사람들,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에 대해 책망하시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격려와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하나님의 희망과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켜주실 때 희망을 주시고 미래를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십니다. 바로 그 약속이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잘 읽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감을 못 잡습니다. 세 토막으로 구분해서 읽으면 눈에 잘 들어옵니다. 5절에서 6절, 7절에서 9절, 10절에서 14절까지 나눠서 읽으면 분명한 주제가 나타납니다. 5절에서 6절의 이야기는 너를 조롱하던 원수들, 대적들이 거꾸로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7절에서 9절까지는 하나님의 나라, 희망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데 이것은 놀랍게도 고난 없이 순탄하게 잉태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10절에서 1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즐거움과 기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내용입니다. 원수를 대적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는 그분의 말씀에 떨고 있구나. “너희를 미워하는 너희 형제는 내 이름을 부른다는 이유로 너희를 따돌리면서 ‘어디 한번 여호와께서 영광을 드러내셔서 너희가 기뻐하는 모습을 좀 보자꾸나’ 하고 비꼬아 말하지만 그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5절)여호와를 대적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여호와를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자를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주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영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핍박만 받지 않아도 다행입니다. 특별히 요즘에는 교회를 조롱하고 핍박하고 무시하려는 반기독교적인 경향이 시대의 사상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비판하고 냉소주의적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왕따’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이든지 그 인생은 불행하고 나쁜 영향력을 줍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상처가 깊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보다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을 보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공격하고 그 사람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를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성읍에서 아우성 소리가 난다. 성전에서도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원수들에게 그들이 받아 마땅한 대로 앙갚음하시는 소리다.”(6절)‘성읍에서 아우성 소리가 난다’라는 말은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이 귀향해 성읍으로 돌아와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쁨의 소리를 외치는 것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앙갚음입니다. ‘성전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면서 들리는 소리입니다. 망치 소리와 벽돌 소리가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소리겠습니까. 바로 원수들에게 이 소리를 듣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왕따’시킨 사람들은 결과적으론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들은 나중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겪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와 민족의 탄생 두 번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새로운 개념으로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민족이 신기한 방법으로 탄생된다는 것입니다. “시온은 진통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낳았고 산고가 덮치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다.”(7절)아이를 낳는 여인의 비유입니다. 임신한 여자가 해산달이 돼서 아이를 낳게 되면 예외 없이 진통을 합니다. 산고를 겪습니다. 산고를 겪고 난 다음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7절 말씀은 시온이 진통을 하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라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나라가 약속대로 태어날 때는 고통 없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순산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께서 해방시켜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력하고 애쓰고 독립운동을 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나라도 선조들이 8.15 해방 전에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쟁과 희생을 했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독립운동을 해서 무력으로 다시 나라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막판 뒤집기를 한 것입니다.산고 없이 아기가 쑥 나온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약속입니다. 새로운 개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고생을 안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해방을 위해서 감옥에 들어가고 순교하고 너무나 비참한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그것 때문에 나라가 해방된 것이 아니고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의 방법으로 순식간에 한반도에 해방이 왔다는 것입니다. 통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조급할 필요도 없고 너무 방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다 죽어가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살아날 수도 있고 다 망하는 기업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질 수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 어떻게 땅이 하루 만에 생기고 한 민족이 순식간에 생겨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들을 낳고 있구나.”(8절)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루 만에 땅이 생기고 한 민족이 생겨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이성과 믿음의 문제가 생깁니다.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차이고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들의 방법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정치도 사람의 정치가 있고 하나님의 정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하, 사무엘상하에는 하나님의 정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정치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겹고 힘들고 속상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살고 고난 받고 있는 백성들 중 어느 누가 8.15 해방을 상상했겠습니까. 감옥에서 순교를 당하는 사람도, 농민들도, 일반 백성도 일본의 세력에서 벗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로 만들어져가고 있습니다. “내가 아이를 갖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게 하지 않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아이를 낳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나오지 못하게 태를 닫겠느냐?”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9절)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이를 낳게 하는데 누가 막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이를 태어나게 하려는데 누가 태를 막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귀환시키고 시온을 회복시켜서 새로운 약속의 민족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기 때문에 어떤 왕국, 어떤 제왕, 어떤 세력도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앞으로도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얼마만큼이나 더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세계 역사는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하루아침에 나라를 세우시고 없애버리기도 하십니다. 통일에 대해서도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다고 우리는 손 놓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된 것이 아닙니다.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통일이 온다면 역사의 발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시온을 향한 기쁨의 선포 세 번째 부분 10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러한 시온에게 하나님은 책망과 경고도 하셨지만 위로와 격려를 하십니다. 대적 원수의 수치는 곧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온의 기쁨이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예루살렘을 두고 슬퍼하던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매우 기뻐하라.”(10절)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예루살렘을 두고 슬퍼하는 사람은 동일인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요즘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로에서 귀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에게도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하고 소리 지르고 즐거워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새롭고 또 새롭고 또 새로운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것은 새로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면 삶이 허무하고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거듭나고 구원받으면 어린아이처럼 변합니다. 신기함이 있고 감동과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묘한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적인 감동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두고 슬퍼하는 사람들이란 이스라엘이 조국을 빼앗기고 성전이 파괴되고 성읍이 파괴되었을 때,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 예루살렘을 사랑했던 것만큼 슬퍼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성읍과 함께 매우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했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슬퍼했기에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매우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통곡과 슬픔이 아니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감옥에서 말했습니다.(빌 4:4)우리를 어떤 핍박과 고난 속에 집어넣을지라도 크리스천들은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환경을 뛰어넘어 환경을 재창조해서 기쁨의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와 격려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수술하고 병이 들고 장례식을 치른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인생을 즐기고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세 가지 축복 예화를 이사야가 들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그림입니다. 이것은 어머니 품속에서 풍만한 젖을 빠는 순수하고 평화로운 어린아이에 관한 그림입니다. “너희는 젖을 빠는 것처럼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할 것이고 젖을 깊이 빠는 것처럼 그 넉넉함에 기뻐할 것이다.”(11절) 앞뒤 문장이 설명이 안 되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속에 안겨서 젖을 빨면서 잠을 자는 모습입니다. 폭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나도 어머니 품속에 있는 아이는 안심하고 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비유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지가 무너져도 어린아이 얼굴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하늘의 평화가 젖을 빠는 어린아이에게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여러 나라의 재물을 범람하는 시내처럼 넘치게 하겠다. 너희는 그 성읍의 젖을 빨고 그 품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응석을 부릴 것이다.”(12절)세 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평화의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평화의 강물이 흐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대모를 할 수는 없습니다. 평화를 만들자고 횃불을 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비폭력주의자가 자기의 비폭력을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이 설득이 안 되니까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폭력으로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첫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평화의 사도들이 필요합니다. 평화의 선교사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 평화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내가 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여러 나라의 재물들이 들어와서 범람하는 시내처럼 넘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역이 잘되고 전 세계의 재화가 범람하는 시냇물처럼 넘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경제가 잘되었으면 합니다. 흘러넘쳐야 남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남에게 베풀어주고 꾸어주는 이런 축복된 삶이 여러분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허락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젖을 빨고 무릎에 안겨서 응석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입니다. 하나님의 위로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13절)위로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보고 마음이 흐뭇하겠고 너희의 뼈들이 무성한 풀처럼 잘 자라날 것이다. 주의 종들에게는 여호와의 손이 드러나겠지만 대적들에게는 여호와의 분노가 나타날 것이다”(14절)마음이 흐뭇해진다는 것은 눈물이 있고 감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삭막해서 눈물이 없습니다. 다 말라서 흐를 눈물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가족과 사회를 보고 예루살렘을 보면서 흐뭇한 축복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뼈라는 것은 하나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슬픔을 의미합니다. 수난과 고통을 말할 때 뼈를 이야기합니다. ‘뼈가 꺾어진다’든지 ‘내 뼈가 쇠잔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그 뼈가 연한 순같이, 나무같이 자란다고 했습니다. ‘너희 뼈들이 무성한 풀처럼 잘 자란다’고 했습니다. 주의 종들에게는 여호와의 손이 드러나겠지만 대적들에게는 여호와의 분노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희망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내 생각 대신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꿈 대신에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여러분의 인생과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시오. 뼈가 자라는 것처럼 그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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