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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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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만약 베드로사도께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담임목사님으로 시무를 하게 되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말씀의 능력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한번의 설교로 수천명의 회심자를 만들어 내셨던 말씀의 능력이 있었던 분이십니다. 만약에 요한사도께서 오신다면 우리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분은 사랑의 사도이십니다. 모든 상처입고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요한사도의 그 크고 크신 사랑 가운데서, 위로받고 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야고보사도께서 목회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분은 별명은 낙타무릎입니다.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 중의 한분이 우리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하신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한순간에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이들 모두가 함께 목회하였던 교회입니다. 거기다 더하여, 다른 사도들 스테반 집사님과 빌립같은 분도 계셨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교회를 목회하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성도들을 돌보아 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교회였을까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분들이 목회하고 있었던 이 교회에도 교인들간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많은 구제를 하고 있었는데, 헬라파 사람들이 교회의 구제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파과부들과 헬라파과부들과 구제하는데 있어서 차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아무리 대단한 분들이 목회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지상에 있는 교회 가운데선, 원망과 불평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교회라고, 천사같은 분이 목회한다고 해도, 교회 안에 문제는 늘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문제라도 은혜로운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와의 차이점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 풀어가는 방법에 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처방이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도들의 해결책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그들이 내건 해결책은 보다 정의로운 분배를 위한 감시관을 둔다든지, 분배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보았던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교회 안에 분배의 문제로 인한 원망과 불평 그것은 결코 분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부족이고, 은혜의 부족이며 영성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이 넘친다면, 은혜가 충만하다면, 결코 그같은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도들이 보았던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실, 교회의 영적으로 새로워지도록 하는 일을 위하여, 섬기면 섬길수록, 한 교회가 새로워 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영적 위기대책 말씀과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놓고...' 사도들이 실제로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만 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자, 이 문제의 근원은 결국 말씀과 기도의 부족에서 온 것임을 파악했던 것 입니다. 교회는 거의 못 느낄 정도로 예전과 같았을 것입니다.
외면적으론 여전히 말씀중심의 교회이며, 사람들은 몰려왔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이미 갈리기 시작했고, 불평과 원망이 넘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과 이해는 간 곳이 없고, 예리한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이미 말씀을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교회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그저 피상적으로만 볼 때가 많습니다. 사건이 생기면, 그 사건의 겉모습만 보고, 처방을 하는 것입니다. 싸우면 싸움을 말리고, 다투면, 서로 화해하도록 만드는데 주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영적문제가 있음을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다워 지는 것은 영적인 세게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적위기를 당하여 물론 영적인 위기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만, 여하튼, 영적위기를 당하여 우리들이 하여야 하는 일은 바로 사도들이 택하였던 그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영적위기를 당하여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택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말씀의 흥왕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사도들을 핍박하던 허다한 제사장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자신의 영적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무엇인가 무기력해 가는 신앙생활에 위기를 느끼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이것이 정상이 아닌데 하는 느낌이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때, 우리들은 먼저 교회가 기도하는 집에 되어가고 있고, 말씀이 바로 증거되고 있는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흥왕할 때만이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살아있는 교회가 된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읽었던 본문의 배경은 이와 같습니다. 출애굽하여 시내산 밑에 이르렀던 이스라엘백성들은 잠시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 뵙고 있는 동안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경배하고 또 춤추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시기로 하였으며, 천사를 보내어, 가나안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되, 함께 가시지는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모든 백성들은 슬퍼하며, 단장품을 제거하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후, 모세가 이제 진밖으로 회막을 만들고 그곳으로 나가는 장면이 오늘의 첫장면입니다. 회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떠나가신 이스라엘진영은 슬픔에 잠겨 있었으며, 모세는 회막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나갔던 것입니다.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 충만하신 분이, 그 충만한 공간 가운데서, 떠나시기도 하시고, 돌아오시기도 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진 가운데서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같은데, 모세는 진을 떠나서, 회막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모세와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가지고, 특별한 장소에서 드리는 특별한 기도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급박한 문제를 가지고, 특별한 기도를 드릴때도 있으며, 특별한 장소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장소에서도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의 집을 나서서, 하나님의 집으로 나오는 신앙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모세가 기도하러 회막으로 간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가는 모세와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여호수아가 있었는데, 이 분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회막을 떠났을 때도, 그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계속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 전, 이미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점령했으며, 한번의 기도에 해를 멈추어 서게 했던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도 한번의 기도로 병자를 고치고, 바다를 잠잠케 하였었습니다. 모세도 한번의 기도로 바위에서 샘이 솟게도 하고, 바다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있는 기도가 결코 한번에 생기는 것이 아님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의 평소에 행한 기도의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한번의 기도가 능력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그분은 모세와 함께 한 기도의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그같은 기도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백성들은 장막문에 나와서, 회막으로 가는 모세의 일행을 보면서,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는 챘지만, 함께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분명 부흥의 역사속에서도 이같은 일들은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영적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또 일부의 사람들이 그 어떤 영적행동을 하고 있음을 보면서,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나 여호수아는 제자들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드은 영적인 현실을 파악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전까지 살던 습관적인 영적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영적행동들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물론 기도했을 것입니다. 평소에 정기적으로 예배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기도에 더욱 더 전무할려고 하는 각오와 함께 특별한 영적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욱 더 깊이 읽고, 많이 읽으며, 기도를 더욱 더 깊고, 열심히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를 찾아 기도와 말씀에 전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어가던 교회는 바로 이같은 이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덧입기 시작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총을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하려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지 말고, 한 사람의 천재에게 눈을 돌려야 한 다'고 어느 재벌 총수가 말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제 밥벌이나 하지만, 천재적인 사람들은 수십만명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공식이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준비된 뛰어난 한 사람을 통하여 잠들어 있는 교회의 영적인 회복을 주시기도 하고, 어두운 역사를 깨우시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들 대부분은 일간신문을 읽는 것만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으며, T.V.를 보는 시간만큼도 기도하고 있질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건강하고 또 즐겁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바쳐도, 기도를 위하여서는 거이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지 고통스러운 의무로 작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묘목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아도, 거목같이 모이는 성자같은 이들은 눈에 띄지 않고, 어린 나무같은 성도들은 많아도, 거목같은 신앙과 인품과 능력을 지닌 믿음의 위인을 만나기는 너무나 어려운 오늘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있는 것같은데,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한 교회가 기도의 영성을 유지하고 있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곧 그 교회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며, 교회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모습을 지니느냐 하는 것과도 직결됩니다. 단지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착각일 것입니다. 데이트를 하는 남녀가 함께 몸은 함께 하며 걷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 마음은 전혀 딴 남자, 딴 여자에게 가 있다면, 그 데이트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사건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녀가 데이트를 하며, 서로의 관계를 더욱 더 깊이 만들어 갈 때에, 사랑의 사건으로서 결혼이라는 역사가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거룩한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예배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림으로써 어두운 세상에에 의의 길을 걷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절박한 삶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삶이 안일하고 나태한 사람들 가운데 신령한 영적 인물이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와 성도라는 우리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절실함만이 우리들을 간절한 기도로 내 몰게 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려는 불붙는 열심도 없이 무너져 가는 교회들을 보면서도 도, 수수 방관하면서 늘어나는 회중들의 수에 스스로 만족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스왈드 스미스목사님 '나는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묻는다, 하나님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을 기 뻐하시는가?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주님께서는 매일 기도의 삶을 사셨지만, 특별한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즉, 특별한 기도와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살아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누군든 이 교회를 들어서고, 예배를 드리면서, 느끼고 알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이런 교회를 꿈꾸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장막문을 나설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막문에 서서, 무엇인가 신령한 일들을 하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 구경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이 살아있기 위해서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한두번 기도한다고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가자,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구름기둥이 회막으로 왔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백성들이 다 보았고, 그들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보고, 경배드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문제를 느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흥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다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민족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한국교회가 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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