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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갈등을 극복한다 (창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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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앙은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들고 원위치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고 열매가 풍성합니다. 믿음으로 한 것은 남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세월이 갈 수록 흩어집니다. 불신앙은 최악의 상황을 만듭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의 여행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람의 첫번째 행동은 실패였습니다. 그는 결국 원위치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1절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약속의 땅에 기근이 있다고 애굽으로 피신한 아브람은 많은 수고와 수치를 당한 후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남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헛수고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지 않는 것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
3-4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니”

탕자에게 남은 것은 배고픔과 가난함과 외로움과 절망 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는 의기 양양했습니다. 그는 신사복을 입고 떠났다가 돌아올 때는 거지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엔 행복이 약속된 것 같았고 행복을 거머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면서 그 인생마저 떨어지고만 것입니다. 그는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를 먹는 신세가 되었고 하는 수 없이 결국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원위치로 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과 그 일행은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옛날에 장막쳤던 곳(3절)이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곳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브람이 갈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된 땅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기근처럼 보이고 어려울지라도 그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원위치라는 사실입니다. 드디어 아브람은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곳이 진정으로 당신의 믿음을 발견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다시 원위치, 곧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돌아와서 믿음의 삶을 새로 시작합니다. 믿음의 삶을 시작할 때 첫번째 기근을 만납니다. 믿음의 삶을 새롭게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 결코 편한 것은 아닙니다. 갈등을 만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 형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으면 환경이 좋아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환경을 이길만한 힘을 얻습니다. 어떤 환경도 이겨냅니다. 어떤 모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갈등도 극복합니다.

다투기 시작하는 롯과 아브람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여지껏 아브람과 롯이 잘 살고 있었는데 서서히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브람의 가축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상 세상의 전쟁도 그렇습니다. 복잡하게 보여도 깊이 들어가 보면 아이들 싸움처럼 단순한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싸움은 두 가축 목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아브람과 롯의 싸움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갈등은 해결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안보거나 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는 가까운 사이에서 생겨난 갈등은 극복하기에 무척 힘이듭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갈등의 뿌리가 깊어지고, 그 갈등이 대를 이어서 해결되지 않아 개운치 않고 찜찜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특별히 가족이나 친족 중에 일어난 갈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아브람과 롯의 갈등은 바로 친족과의 관계, 즉 같이 사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겪는 갈등이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갈등을 느끼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이 짧은 성경구절에 그 이유가 몇가지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빈부의 차이가 갈등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람은 롯보다 연장자며 가장이었습니다. 그외에도 아브람이 롯보다 재산이 많다는 것은 이해할만한 사실입니다. 그는 은과 금과 가축이 많았습니다. 돈이 많고 부유하다는 것이 뭐가 잘 못되었단 말입니까? 5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성경은 롯의 재산을 아브람의 재산에 비해 빈약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이 좋지만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속상하고 불편한 것입니다. 이것이 빈부의 문제입니다. 이 지상의 가장 큰 문제는 빈부의 문제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자신들이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부자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잘 사는 것은 정직해서가 아니고 나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 쉽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오만과 교만의 경향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돈 뿐 아니라 권력을 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조금 잘나가게 되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지배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이것이 계속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6절에 보면 갈등을 일으키는 두번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북한에서 형제가 피난 나와서 한 판자집에서 살 때는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직업을 갖게되고 돈을 갖게 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집이 좁아집니다. 아침에 누가 먼저 화장실을 쓰느냐가 작은 일이지만 그 일로 신경전을 벌이게 됩니다. 신문이 오면 누가 먼저 보느냐도 문제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작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과 롯도 공간이 비좁게 되었습니다. 이제 땅을 넓히거나 누군가 떠나야 하는 시기에 왔습니다.


얼굴 없는 전쟁 ‘대리전’
두 목자들 간의 갈등의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대리전’입니다. 직접 아브람과 롯이 싸웠더라면 문제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싸운 것입니다. 얼굴없는 전쟁을 일컬어 ‘대리전’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의 전쟁은 예전의 미·소간의 대리전의 양상에 불과합니다. 대리전은 윤리가 없으며 진리도 없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투쟁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지시를 받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일단 어떤 정당에 속해 있다면 자기의 개인적인 소신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정당이 결정한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대리전입니다. 두 가축 목자들이 싸우고 나서 주인에게 어떻게 보고했겠습니까?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는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롯의 가축의 목자가 잘못한 것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롯의 가축의 목자도 그렇게 거짓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롯은 뒤에서 보고를 받는 위치에 있었기에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아브람과 롯이 싸우고 있는 그곳에 벌써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있더라’는 말은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느날 자기 동네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단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열심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어딘가 사라졌다가 오더니 둘이 열심히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토구세력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보고 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 시대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닙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개척교회를 세우고 나서 찬양을 부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구제와 통일을 말하며 민족을 책임진다고 말하면서, 선교와 사랑을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로 고발하고 법정에 서며 신문에 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을 누가 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봅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일입니까? 이런 일을 아브람이 겪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렇게 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갈등이 계속되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갈등은 해결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당신이 계속 갈등하고 서로 고발하고 고소하고 싸우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세상사람들은 박수를 칩니다. 여러분 가정의 갈등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새벽기도회 열심히 나오고, 아무리 예수를 열심히 믿어도 남편을 잘 못섬기면 그 남편이 예수믿게 됩니까? ‘너나 잘 믿어라’고 하며 외면하게 됩니다.

믿음은 삶과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정말 저 사람은 예수를 믿는구나라고 말할 무엇이 있어야 그들도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장로나 목사의 이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싸우고 소리지르고 용서하지 못한다면 누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갈등해결을 결심하는 아브람
아브람은 이런 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이방땅에 와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계속 갈등을 갖게 된 사실을 볼 때 아브람은 가슴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데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내 주변에 생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방관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이 문제에 대해 모종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8절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우리는 8절에서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갈등을 해결하는 영적 원칙들을 배우게 됩니다.

첫번째로는 ‘아브람이 롯에게’라는 말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해결의 주도권을 갖지 않습니다. 해결되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어떤 의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무언가 잘 못되었을 때 어린 사람이 윗사람을 찾아갑니다. 아브람과 롯도 동양 문화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반대로 아브람이 롯을 찾아갑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이 예수 믿는 다는 특징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먼저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네가 먼저 사과하면 나도 하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먼저 가서 사과를 합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 한마디면 다 풀어질 일을 너무나 오래 갈등을 지속 하게 됩니다.

8절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갈등해결의 실마리는 ‘우리는 골육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문제해결 방법으로 누가 잘 했는가 못했느냐를 따지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잘했다’ ‘잘못했다’는 것 가지고는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감정이 나빠지고 관계만 어려워질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의감에 넘쳐서 잘잘못을 따지려고 합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가서 잘잘못을 따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잘못이 많다면 롯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 문제해결을 위해 ‘우리는 한 골육’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갈등이 생겼을 때에 ‘우리는 한 피받아 한 몸이룬 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냐’는 이 한마디 말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없습니다. 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될 사이가 아닙니까?

세번째, 아브람은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문제를 ‘대리전’에서 당사자에게로 끌고 온 것입니다. 문제를 정면돌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면 돌파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위험성이 따릅니다. 그래서 그것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대리전에서 당사자의 문제로 돌아왔다는 것은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갈등은 당신이 책임지려고 하면 해결됩니다. 문제를 방치하면 사고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해결하는 방법을 알면서도 가만히 놔둡니다. 내가 괜히 손댈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알아서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마냥 문제를 방치합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를 보고 뛰어들어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기리켜 믿음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안 있는 결단
또 하나의 해결방법이 9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아브람은 문제를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대안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갈등을 겪는 것은 땅이 비좁아서인데 여기 앞에 땅이 많이 있지 않느냐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전을 제시하면 덜 싸우게 됩니다. 비전이 없으면 사람들이 싸우게 됩니다. 성경에도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대안 없이 하는 말을 가리켜 원망이라고 합니다.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하는 말은 옳긴 옳지만 불평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평도 일리 있는 말들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를 그르치게 합니다. 이유는 대안 없는 불평과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여기서 ‘땅이 있지 않느냐’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나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결단을 요구한 것입니다. 서로 붙어서 싸우지 말고 헤어져서 잘 살자고 결정합니다. 생각하기는 쉬우나 행동하기는 어렵고 정의를 말하기는 쉬우나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왜 실천되지 않습니까? 정의롭지 않은 사람이 정의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며, 정의를 자기의 무기로 삼기 때문입니다. 나를 떠나라는 것은 쫓아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롭고 과감한 결단을 의미합니다.

실리의 양보가 갈등 해결
9절에서 또 한 가지의 문제 해결의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실리의 양보’입니다. 아브람은 여기서 자신의 실리를 아낌없이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해 보기로 결정하면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없습니다. 자존심을 꺾기로 결정하면 해결 되지 않는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뺨 맞고 비난 듣고 사람들의 채찍을 맞고 침뱉음을 당했는데 실은 그런 대우를 받을 아무런 잘못이 없으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사명이 있었기에 그런 고난을 쉽게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당신이 우하면 내가 좌하고, 당신이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는 지경까지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한 번 크게 혼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시련과 실패를 통해 인생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싸워서 분열하기보다 손해보고 하나되겠다는 의지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믿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손해보고 자존심을 꺾는 데까지 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선택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다른 세상에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살지만 하늘나라 사람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울 또 한 가지 사실은 아브람이 이 말을 할 때 감정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 내가 포기하지!”라고 하는 말을 감정적으로 내뱉습니다. 이것은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미움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만과 편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아브람의 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롯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형이었지만 “네가 먼저하렴. 하고 싶은대로 다 해보렴.”하며 말합니다. 상처를 주지 않고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영적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양보를 하면서도 상처를 주지 않고 손해보는 쪽을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승부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갈등이 있습니까?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계십니까? 혹시 손해보기 두려워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직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갈등이 계속되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갈등은 쉽게 해결될 것이며 하나님은 여러분의 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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