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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기근을 만난다 (창 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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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브람을 택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길 원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순종했고 그렇게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작되었다고 믿음의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위기와 고난과 기근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고난을 겪을 때 순수해지며, 역경을 만날 때 강해집니다. 그리고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갓태어난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때는 우유를 먹습니다. 커가면서 죽도, 밥도, 고기도 먹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병치레도 하고 사고도 당합니다. 자라나면서 사람들에게 거절 당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실패, 좌절, 거절을 경험하게 되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수많은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어른이 되듯이 믿음도 그렇게 성숙합니다.

약속의 땅은 기근의 땅이 되고
하나님은 아브람이 믿음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 믿음을 연단시키시고 성장시키고 키워주십니다. 10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잠시 방향을 잃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곳이 하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 계속 머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음의 여행을 계속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나이는 75세 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계속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도착해 보니까 당황할 일만 생겼습니다. 그곳은 장미빛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기대했던 것처럼 황홀한 장소가 아니었고 오히려 사람이 살 수 없는 기근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습니다. ‘이곳은 살 수가 없는 땅인데 왜 하나님은 이곳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며 나를 보냈을까? 갈대아 우르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아브람은 잠시 애굽에 피신할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 무서운 믿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 땅은 가나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순간적으로 애굽으로 가려고 했던 아브람의 생각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삶을 시작할 때 그럴듯한 생각에 속지 않으셔야 합니다. 불가능의 벽에 부딛혔을 때, 기대했던 것들을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럴듯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비틀어 놓습니다.

여러분, ‘진짜’와 ‘가짜’는 다릅니다. 비슷하다고 ‘진짜’일 수 없습니다. 영감이 떠올랐다고 다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비슷하다고 해도 같은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상식과 이성과 경험과 의논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중에 자꾸 이성과 타협하며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상식, 합리성에 주저 앉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않고 환경도 시시 때때로 변합니다. 믿음이란 변하는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기근이 있어도, 절망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잡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목표를 바꾸지 마십시오. 고난이 온다고 해서 계획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냥 밀고 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기 때문입니다. 편한 곳으로, 행복이 약속된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가지 마십시오. 대부분 그런 곳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세상이 약속하는 보장된 행복은 결코 오래 가는 것들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위기에 부딪혀 너무 급한 나머지 순식간에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깊지 못한 것입니다. 애굽으로 잠깐 피신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을 포기한 아브람
이런 생각을 하고 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브람은 두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믿음을 갖지 않으면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불안과 두려움, 나쁘고 불길한 생각이 찾아 옵니다.

그것이 11-12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브람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인간적인 아이디어와 합리적인 생각과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은 생각을 따라가기로 결정했을 때 또 하나의 위기에 부딪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불안이 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애굽으로 조금씩 다가갈 수록 불안이 커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불안해지면 보는 시각이 모두 달라집니다. 불안해지면 세상사람들이 모두 도둑놈처럼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사랑스러워집니다. 하지만 불안하면 자기 아내마저 달리 보입니다.

아브람의 아내는 왕이 탐낼 정도로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도 평소 그 부인이 예쁜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불안해진 후에 부인의 얼굴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여자가 이렇게 예쁜데 다른 남자들이 내 아내를 탐내지 않을까?’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대신 찾아오는 불안
불안은 불안을 낳고 최악은 최악을 만듭니다. 자기 아내가 예쁘다는 것이 발단이 되어서 다른 남자가 내 아내를 데려갈 것이라는 불안이 찾아 오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아내를 빼앗아 가려면 나를 죽이겠지?’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길한 상상력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입니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을 이렇게 극대화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여러분에게 축복일 수 있고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미래가 축복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불안할 것입니다
.
아브람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순식간에 믿음을 포기했습니다. 그때 불안이 찾아왔고 그 불안 때문에 드디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한 것입니다. 갑자기 아브람 자신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더 불안해 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수단과 방법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거짓말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13절에 나옵니다. ‘원컨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은 갑자기 자기 부인을 빼앗기고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그의 머리에는 스쳐 지나가는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 부인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굉장히 그럴 듯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실수가 거기에 있습니다. 비슷하게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비슷한 것이 진짜일 수 없습니다. 가짜일 뿐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아브람과 아내는 누이 관계였습니다. 친척관계로 보면 누이는 누이였지만, 사래는 엄연한 아브람의 부인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첫 여행부터 좌절과 실패를 경험합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성공하지 않습니다. 기근을 만납니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 앉지 마십시오.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기근을 만나봐야 합니다. 기근을 만나고, 고통을 겪고, 손해를 보고, 위기에 부딪혔을 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근이 참 중요합니다. 기근은 나의 믿음을 순결하게 만듭니다. 위기 앞에 끌고 가기도 하지만 그 기근은 나의 믿음을 진실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아마도 애굽에 이르기 전에 아브람과 아내는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말하자고 열심히 연습했을 것입니다. 애굽에 도착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미인을 아내로 두었느냐고 물었고, 아브람은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애굽사람들이 사래가 아내인 것을 묻기도 전에 ‘이 사람은 내 누이입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떠나면 염려와 불안이 당신을 사로잡게 됩니다. 불안하면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까지 다 망쳐지고 맙니다. 가장 지혜롭게 생각한다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결론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란 자신의 꾀에 자기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생을 줍니다.

두번이나 놓친 기회
드디어 사건이 생겼습니다. 15절입니다.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문제는 바로의 대신들이 그 여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가만 있었으면 될 것을 자꾸 자신의 누이라고 하니까 바로의 대신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우리 왕의 후처가 되어야 마땅하다라고 생각하고 바로의 후처로 추천한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아브람에게 그 여인이 자기의 누이가 아니고 아내라고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랬으면 부인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판 무덤에 자기가 묻혔고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걸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살이입니다. 이것이 정치, 경제, 사회에서 매일매일 목격하는 바입니다. 지금 다 잘되는 것 같지만 몇년이 지나면 죄인이 될 수 있고, 지금 죄인이지만 몇년이 지나면 또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울고 웃고 합니다. 조금 잘못 되면 울고, 조금 잘 되면 으시대고, 조금 상황이 나빠지면 코가 석자나 빠지곤 합니다. 춤추는 인간, 놀이개 인간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상황은 좀 더 복잡해 지고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선물은 사람의 입을 막게 합니다. 뇌물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왕이 너무나 고마와서 아브람에게 아주 극진히 환대를 합니다. 양과 소, 노비, 나귀, 약대 모두를 선물로 줍니다. 이 선물을 받을 때마다 아브람의 가슴은 얼마나 철렁거렸겠습니까? 그것이 세상에서 얻는 축복들입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은 쌓을수록 좋아 보이지만 그 소유가 많으면 불안지수가 높아집니다. 염려와 근심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했는데 아브람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더 기막힌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기근입니다. 기근이 왔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가나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절대로 굶어 죽지 않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리석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그런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대 약점은 기근 안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하고 편하고 쉬운 길을 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평생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성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편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추구해 보았지만 남은 것은 허무함 뿐이었습니다.

인간의 실패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17절을 보십시오.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여기서 우리는 첫째 아브람은 실패하고 실수하고 낭패를 보았지만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포기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에 개입하셨습니다. 이 위기를 막아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브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앞으로 먼 훗날 사래의 몸에서 메시야가 태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씨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때문에 그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나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혹은 ‘신비스런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시기를 원합니다. 나는 실패하고 실수했지만, 부인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상황에 들어와 버렸지만 하나님이 보호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개입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길이 되시고 인간이 소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희망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로 하여금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건들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바로는 억울합니다. 그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아브람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된 바로가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믿음을 포기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생겼고,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을 한 결과 아내를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의 실수로 피해보는 애굽왕
17절에서 발견하는 또하나의 놀라운 메시지는 믿음의 사람이 믿음을 포기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으면 주변의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구약의 요나에게서 봅니다. 저는 목사이자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오늘날 이 땅의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불안은 우리 교회 책임이 아닌가, 교회가 정신차리지 않고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인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에 세상이 환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을 버렸을 때 주변사람들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피해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18, 19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여기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아브람이 당하는 수치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사람들에게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는 아브람이 창피를 당하고 야단을 맞습니다. 믿음이 없으며 부끄러운 일을 당합니다. 믿음을 포기하면 염려와 근심이 쌓이고, 염려와 근심이 쌓이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수치를 당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여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고생하고 수고만 했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인생의 결국은 원점이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영원과 천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배우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환경에 의지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환경은 여러분에게 고통과 기근을 줄지라도 말입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결과가 나쁘다고 결론내리지 마십시오. 홍해 앞바다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면 그곳에 버텨보십시오. 비록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 온다고 해도 거기서 버텨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근을 견디셔야 합니다. 고통을 견디셔야 합니다. 도피하거나 도망가면 다 망가집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 고난을 통해서 믿음을 보게 하시길 원하시며, 이런 고난과 기근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 시키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피해 나가면 갈 길이 없습니다. 그냥 견디셔야 합니다. ‘왜 하나님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제 견디고 기다리고 버티면 신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할 곳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라고 여러번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한 것처럼 십자가를 만약 피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물거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를 피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손해를 보고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제일 안전한 것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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