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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순종으로 시작된다 (창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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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까닭은 아브람에게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전과 꿈때문에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2절과 4절에서 네가 만약 내 말을 듣고 순종하면 나는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에는 하나님의 복과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복은 3가지 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순종’으로 시작되는 믿음
그런데 믿음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는 것일까요? 오늘 4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세였더라
4절에는 세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하는 순간부터 믿음이 생깁니다. 4장 4절을 보면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여자가 결혼하면 임신을 합니다. 그러나 언제 임신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임신을 한 것입니다. 몇주일이 지나고 한 달 두 달 지나가게 되면 자기 몸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임신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생기는 순간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믿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생겼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믿음이 자라납니다. 믿음에는 완성품이 없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만큼 큽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만큼 자라나는 것입니다.

어느날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놀랍게도 한 번도 본 일도 없고 경험한 일도 없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아브람의 믿음의 여행은 시작됩니다. 믿음과 대치되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성’입니다. 이성은 상식, 지식, 합리성, 경험의 바탕에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성에 의하여 판단하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성으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더 큰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꾸만 이성으로 하나님을 측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가 하나님일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성으로는 하나님은 믿어지지 않고 잡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순종함으로 그의 말씀을 믿을 때 이성은 그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이성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성은 하나님을 확인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을 믿는 순간부터 믿음은 탄생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만큼 완성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깊이는 곧 순종의 깊이 입니다. 당신이 교회에 30년 나왔는가 40년 나왔는가가 믿음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할지라고 믿음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나온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믿음이 클 수가 있습니다. 이성, 상식, 경험같은 것으로 이해되진 않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순종했다면 믿음은 그만큼 깊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해 주는 재미있는 두가지 표현을 여기서 발견합니다. 첫째는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믿음은 현재 받는 보상이 아니라 장래에 이뤄질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부산으로 가라고 하면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걱정하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생기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고 의롭고 영광스런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그 믿음, 마지막에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준다는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따라가라
4절을 보면 또한가지 우리가 믿음에 대해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다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고 가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기 두 사람이 나옵니다. 아브람과 롯입니다. 아브람은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롯은 사람을 좇아갔습니다. 이 두사람은 비슷한데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 믿음은 어느 때 들통나는 줄 아십니까? 위기가 올 때입니다. 고통이 올 때입니다. 역경에 부딪힐 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정말 다 죽을 것만 같은 그런 위기 앞에서도 그는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거짓된 믿음, 위선된 믿음, 사람을 좇아 다니는 믿음, 인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겉모양은 화려하지만 위기에 부딪혔을 때, 역경에 부딪혔을 때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에 의지하여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십시오. 목사나 교회를 좇아다니지 마십시오. 사람을 좇아다니면 꼭 얻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실망과 상처입니다. 사람따라 다니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위대한 사람 옆에 서있다고 내가 위대해 지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람 옆에 있다고 내가 배부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따라 다니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이성을 뛰어넘어서 상식과 합리성과 우리가 배운 모든 지식의 영역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기적이 일어 납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위기를 느낀 사람들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다니기 보다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베드로를 따라다녔습니다. 아볼로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사람들이 예수를 보지 않고 자기를 보니까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7, 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며,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또 한가지 발견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4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세였더라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첫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4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가 칠십오세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하란을 떠날 때가 칠십오세였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11장 31-32절을 보십시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이 말씀을 보면 아브람만 떠나지 않고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과 그의 부인 사래와 함께 가족 전체가 이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떠났을까요? 아브람이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족이 다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나안 땅에 가기 전에 좋은 땅을 발견해서 거기서 도중 하차한 것입니다. 그 땅이 하란이었습니다.

여러분, 고속도로 휴게소는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음료수를 잠깐 마시기 위해 가는 곳이지 살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란은 잠깐 머무는 곳인데 데라는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가 종착역은 아닌데, 이상의 땅은 아닌데 여러가지 주변 환경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러 있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고민 고민 끝에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란을 떠나서 믿음의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칠십오세입니다. 데라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떠난 후 60년을 더 하란에서 살다가 2백5세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에 대한 두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인생은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도중하차했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칠십오세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용기입니다. 다시 시작하십시오.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습니다. 시작하는 나이가 바로 믿음의 나이 입니다. 아브람은 비록 아버지를 떠나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믿음의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었고, 그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조상이라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장애물 ‘고난’
믿음으로 나가면 모든 일들이 다 은혜가운데 이뤄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나가면 장애물을 만납니다. 6절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믿음으로 나가서 그 땅을 통과해서 세겜 상수리 나무까지 가 보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준비한 번쩍이는 황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동산 같은 곳이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땅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원주민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원주민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날 인도하시려면 백지를 만들어 주시던지 돈을 주시던지 뭔가를 주셔야지...’ 이것이 세상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방법은 이와는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고난이 따릅니다. 그리고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비전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요, 고난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요, 동시에 하나님의 기적이 없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 세가지가 다 있습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쳐낼 수가 있겠습니까? 가나안 땅 사람들은 억울한 일입니다. 이방인이 들어와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내놓으라고 하니 그들이 내놓겠습니까? 그 땅을 포기하거나 물러 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피 눈물나는 투쟁이 기다리고 있으며, 기득권 세력과의 처절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옥토에 승리의 깃발을 꽂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런 것만 기대합니다. 예수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예수님 믿으면 만사가 다 잘 되고, 자동차 한 대가 두 대가 되고, 삼십평짜리 아파트가 육십평이 되고, 과장이 부장이 되고 하는 생각만 합니다. 그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믿음의 현실에 부딪혀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갖기 원하면 영적 전쟁을 만납니다. 영적 전쟁은 가나안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있습니다.

믿음은 옛 자아가 완전히 죽어야
정말 여러분이 이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의 여행을 시작하려면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깨지고, 옛 사람이 무너지고, 옛 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 사람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의 옛사람과 피눈물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과거와 나의 옛 사람을 죽이고, 자아가 깨지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 안에 이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고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것 하지 말고, 나를 죽이지 말고, 잘 좀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덧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덧칠을 하려고 합니다.

믿음은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두려워 합니다. 그냥 잘만 좀 되달라고 합니다. 재수좋게, 운수좋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으면 믿음이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십자가의 복음과는 말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천국이 이루어지고,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여지 없이 여러분의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과거를 죽여야 합니다. 그것을 죽이지 않고 새 사람이 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과 싸울 수 밖에 없는 현실과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비전을 주시고 이제야 또한번 나타나십니다. 위기에 부딪혀 믿음과 비전이 흔들릴 때 나타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실상 그곳은 가나안인들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네 땅이다’라고 해서 가보면 내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땅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황홀한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 믿음의 세계가 아닙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왜 10년전이나 20년전이나 30년전이나 똑같습니까? 바로 이 문제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축복입니다. 고난도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탈출 시켰을 때 2주일만 곧장 가면 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할 것이지 왜 사십년을 광야에서 고생하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네가 내 말을 듣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런 시련을 자꾸 주셨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배 가운데 머무는것
7절에 보면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이땅은 네 땅이라는 비전과 믿음을 확인시켜 주셨을 때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인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배를 드립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 가운데 머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예배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봉사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을 보면 예배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은 예배에서 흘러나오는 결과일 뿐입니다. 사역을 계속하게 되면 탈진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고, 자고하게 되고, 우쭐하게 됩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는 얼마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했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예배 가운데 깊이 들어 갔느냐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하는 사람은 절대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없이 사역을 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하고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8, 9절을 읽겠습니다.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십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 제단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때 예배가 이뤄지는 줄 믿습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많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으시고 존귀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름이 그분의 이름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이름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참된 예배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그 곳이 성령이 기름부으시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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