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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는 계속 되다 (창 09: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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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대홍수의 심판으로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멸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잘렸다고 뿌리채 뽑힌 것이 아니듯이 죄의 현상은 제거할 수 있지만 죄의 뿌리는 남아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벌을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심판을 받고 대가를 치루면 자신의 잘못이 상쇄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대가를 치루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만 씻김받을 수 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온 이후에 비교적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몸서리가 쳐지는 홍수가 지나간 후에 다시 평정을 찾았습니다. 홍수를 겪은 노아와 그 가족들은 경건하게 살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비가 온 이후에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보면서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한번 고생해본 사람들은 다시는 불장난을 하지않지만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이 나고 고생한 것들을 몇달은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은 고난을 잘 잊어버립니다. 성수대교 사건도, 삼풍사건도 그 이후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도 잊혀졌습니다. 사건을 만날때는 당황하지만 금방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죄를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또 죄를 짓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자녀들의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특별히 9장에서는 가나안의 아버지인 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 아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인류가 번성하고 종족이 번성했습니다. 노아는 농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포도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전원과 같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20절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홍수의 삶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폐허도 지나갔고 무섭던 기억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있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0절과는 달리 21절에서는 문제가 생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포도주를 마시고 그 장막에서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표현은 단순하지만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은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습니다. 취한 것이나 포도주를 마신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포도주 한잔쯤이야. . .’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취하게 할줄 몰랐습니다. 취한들 좀 어떻습니까 그러나 벌거벗고 수치를 당하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노아는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 8절을 보면 노아를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홍수의 심판으로 모든 인류가 모두 멸망했을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6백세 되던 해까지 노아는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아가 걸맞지 않게 포도주를 마시고 백주에 벌거벗어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이 술먹고 옷을 벗었다고 해서 무엇이 수치입니까? 그런데 이 본문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앞뒤문맥과 자녀들의 반응을 보면 아버지가 술먹고 취해서 수치를 당한 사건은 큰 사건으로 보입니다. 자녀들에게 몹시 갈등을 주었고 번민과 부모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마음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22절, 가나안의 아비 함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발을 했고 23절, 나머지 두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화급해서 빨리 옷을 취하여 어깨에 매고 뒷걸음질쳐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고 보지 않고 나왔습니다. 노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성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아 잘 알수 없지만 노아가 지금까지 살았던 모습과는 다른 실수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누구보다도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모든 환경이 평온을 되찾고 땅도 농사를 짓고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 노아가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두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아무리 의롭고 은혜를 입고 성자처럼 살고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3장 10-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지성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 보이고 든든해 보여도 언제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웅이나 성자로 취급하고 박수를 보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하고 존경스럽고 귀하게 살아온 사람이 어느 순간에 처참하게 죄인의 모습으로 무너지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중에 너무나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사람도 어느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무너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렇게 훌륭하고 하나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다윗도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섰을 때 도덕적 실수를 저질러 죽을 때까지 기막힌 고난을 겪습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분들은 인생의 전반부는 잘 살아온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심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후반부에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깨달으십시오. ‘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안에 흐르는 죄는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그렇게 믿고 살아왔던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고 다른 아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부인이 배신하고 떠날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며 현실입니다. 이것을 직시하십시오.

존경하던 스승이 타락과 욕망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노아와 다윗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앉아 있는 여러분도, 또 설교를 하는 저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노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죄입니다. 도덕이나 윤리나 지성으로 포장된 모습은 모두 다 가면입니다. 실제 내면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덕적으로, 외형적으로 깨끗하지만 진정으로 마음도 깨끗한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살인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미움이 있습니다. 간음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탐욕과 음욕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사실적 모습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것은 죄의 강입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웃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자기도 모르게 튀쳐 나옵니다. 저는 화장실 갈때마다 감동합니다. 냄새나는 오물이 내 몸안에 있는데 창자가 잘 감싸고 있기 때문에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터지면 냄새가 납니다. 인간은 본래 냄새가 나는 더러운 존재입니다. 이것이 오늘 노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노아가 노아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실수할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감싸주었고 보호해 주셔서 이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지 내가 잘나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했습니다. 클린턴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들 욕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를 떳떳하게 욕할 수 있는 남자들이 몇이나 될까요. 이 세상의 모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욕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3-18절을 보면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 말씀속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해서는 내 노력이나 의지나 교양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신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다시 한번 자신을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노아에게서 배우는 두번째 사실은 방종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실수한 것은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대홍수 이후에 아무 문제가 없고 평온하며 농사도 잘되고 자녀들도 잘 자랐고 하는 일이 모두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방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그냥 놓아두면 마치 죄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되고 방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시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셨기 때문에 안심도 되었습니다.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교만입니다. 교만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특별히 여러분은 자기 전공분야에서 조심하십시오. 사람들은 자기 전공분야에서는 자신만만해 합니다. 그러나 그 분야에서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할 때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거나 든든한 후견인이 있다고 믿을 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우쭐해집니다. 권력과 돈을 가지고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방자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권력과 돈이 생기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섬기지 않고 지배하려 합니다. 자기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방심이며 교만입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먹고 취했고 하체가 모두 노출되어 자식들에게 수치를 당할 때까지 방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방심은 금물입니다. 잘 될때 일수록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입조심하십시오. 함부로 느낀대로 말하지 말고 가능하면 입을 다물고 계십시오. 드러나지 말고 숨어 지내십시오. 유명해지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좋은 일은 남모르게, 헌금도 남 모르게 하십시오. 알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6장 11-12절을 보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합니다. 익숙한 것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익숙하지 않으면 긴장하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방심합니다. 여기에서 무너진다는 사실을 노아의 실수를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 자녀들의 입장에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하체를 벗었는데 이것은 성적인 타락과 연관이 있습니다. 가나안은 성적 부패의 상징적 민족입니다. 아버지가 실수하고 그의 수치를 자녀들에게 목격당했습니다. 그때 함의 태도와 야벳과 셈의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실수한 현장을 우연히 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함은 의도적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는 우연일 수도 있지만 조작된 사건도 더 많습니다. 그물을 쳐놓고 걸리게 만든 것입니다. 본문문장에서 함이 취한 태도를 자세히 보면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형제에게 ‘염려한다’는 이름으로 고발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와주는 척 하면서 욕합니다. 걱정해주는 척 하면서 불을 지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걱정이 되었다면 하체를 보고 끝냈을 것입니다. 함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리고 소리지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가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럴수 있느냐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을 보라. 아버지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함과의 사이에 상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절대 이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한번 했던 얘기를 자꾸 반복하는 사람은 그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그 말을 계속합니다. 함과 아버지 사이에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함이라는 노아의 자녀에게서 보는 모습니다. 자기의 아버지에게서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꼭 자기의 자녀에게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학교에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돈을 뜯어오라고 시키는 ‘짱’이라는 아이를 보면 모두 부모에게 매맞고 사는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은 늘 아버지에게 매맞은 대로 친구들도 때려서 멍들게 하고 학대합니다. 그것은 만화나 영화에서 본 것뿐 아니라 실제로 자기가 경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남에게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그대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전달됩니다. 불행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아들인데 다른 아이들은 다른 태도를 취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3절과 22절을 비교해보면 함이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사건을 목격했고, 만들었고, 나가서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23절에서 두형제는 아주 조심스러운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고 얼굴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정도가 되면 아버지를 한번쯤은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나왔습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야벳과 셈이 함을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다른 사람을 충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남을 지도하려 합니다. 그러나 야벳과 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도덕적 타락은 함에게는 굉장히 큰 문제였지만 셈과 야벳에게는 이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내게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은 만사가 문제가 되지 않고 내게 문제가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문제가 됩니다. 문제는 그저 지나가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를 건드리면 문제가 됩니다.

함은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사건을 고발했습니다. 셈과 야벳은 듣자마자 얼른 덮어 두고 감추었습니다. 셈과 야벳은 문제를 외면하거나 도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덮어주고 감싸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녀의 나쁜 습관이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줍니다. 되도록이면 미화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 알리거나 지적하지 않고 충고하지 않습니다. 야단치지 않습니다. 회개만 하면 덮어주려고 하십니다. 모른척 하십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해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분노가 있고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고발해야 합니다. 정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 야단치고 사건을 확대시킵니다.

23절에서 셈과 야벳이 아비의 하체를 덮어주고 얼굴을 돌이켜 보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의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23절에 나와 있는 셈과 야벳의 행동에서 참으로 따뜻하고 진지하고 책임지려고 하는 아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배우는 메시지는 여러분의 부모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여러분이 자신의 부모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살아계신 분도 계시겠지만 셈과 야벳처럼 여러분의 부모의 허물과 실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덮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비단 부모님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인의 허물을 덮어주고 모르는 척 해 주십시오. 부모도 연약한 인간일 뿐 죄 자체는 수치입니다. 자식이 죄를 짓고 실수를 하는 것처럼 부모도 죄를 짓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완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내가 연약한 것처럼 우리의 부모도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여러분, 부모를 용서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덮어주십시오. 이렇게 덮어주면 복이 오지만 덮어주지 않으면 저주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24절부터 27절에 예언됩니다. 24-27절을 보십시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노아가 술이 깨어 사건의 이야기를 듣고 함이 괘씸하게 생각되어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부모의 허물을 감싸주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마음을 가진 자녀는 복을 받게 되지만 정의라는 이름으로 드러내는 자녀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상처를 치유받으시고 용서하시고 덮어주십시오. 부모를 용서하시고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부모의 입장에서는 상처를 주지 않았으나 자녀의 입장에서 상처를 입은 자들에게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아비의 하체를 덮고 보지도 말고 뒷걸음쳐서 나오라 그것이 너의 복받을 태도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에게 야단치지 마십시오. 그냥 용서하시고 덮어주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했듯이 여러분도 주변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십시오.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부모의 허물, 남편의 허물,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십시오. 자녀의 허물을 감싸주십시오. 이것이 노아의 사건에서 배우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향해 지나치게 손가락질 하지 마십시오. 그 죄가 내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그 사람의 상황이 아니었을 뿐,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에 처했다면 동일한 죄를 지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마음으로 덮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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