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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홍수의 심판이 끝이나다 (창 0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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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의 심판이 시작된 지 다섯달, 1백 50일만에 드디어 땅 위에 가득했던 물들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심판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구원과 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이야기 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론적으로 보면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방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구원을 받을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방주로 들어가는 것 뿐입니다.

두번째, ‘방주에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만 방주 안에서 사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짐승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 곳이 행복한 장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말미암아 방주안은 복받는 장소로 변했습니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방주 안에서의 삶은 ‘구원의 삶’입니다. 방주에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방주의 삶은 끝이 있습니다. 물이 모두 빠지면 방주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방주를 통하여 구원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하나님은 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심판 뒤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1절에서 우리는 두가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1절 전반부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들짐승들과 육축을 권념하셨습니다. ‘권념(眷念)했다’는 말은 ‘돌보셨다’는 말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보다 방주 안에서 사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그곳에서 죽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이 방주 안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권념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들과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잊혀진다는 것만큼 외로운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외로워하는 것은 잊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준다는 것은 복입니다.
인간의 불안과 외로움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잃어버린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고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될때 인간에게는 절대고독과 불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만질 수 없고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잊지 않는다는 사실만 믿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1절 전반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과 동물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고 기억하여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외롭고, 고통스럽고, 힘들면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내 고통을 알고 계실까?’라는 의심이 생길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노아와 그 가족과 동물들을 기억하고 보살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을 간섭하고 계십니다. 시편 18편 1-2절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여러분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변 환경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피난처요,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십니다. 이런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살아납니다. 절망에서 살아납니다. 어떤 병이나 위기, 불가능에서도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더라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장 어렵고 답답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과 가까이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하나님이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든 자녀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문제있고 상처받은 영혼,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특별히 간섭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감정 때문에, 눈물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의 가까이 계십니다. 여러분을 기억하고 계시며, 여러분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출애굽기에도 이런 예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시간을 관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일찍 오시지도, 늦게 오시지도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맞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잉태된 아이는 어머니 뱃 속에서 열달동안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방주 안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해산은 방주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임신은 하루면 됩니다. 그러나 태중에서 10개월이 지나야 한 생명은 태어나고, 한 인간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20-30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구원의 완성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단을 위한 고난과 여러가지 환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한 사람 모세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십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을 천국백성, 복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잠깐 여러분을 고난 속에서 연단을 시키시고 훈련시킨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1절 하반절의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며 물이 감하였고’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가 40주야로 쏟아졌고 물이 땅에 창일했습니다. 다섯달 동안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은 방주 안에서 기가 막힌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어도 고통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가족들과 동물들을 기억하셨기에 바람을 이용하셔서 물을 빼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람이 물을 원위치로 가게 했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은 하늘로, 땅에서 온 것은 땅으로, 바다에서 온 것은 바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메시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때도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침묵하고 계신 것 같지만 침묵 뒤에서 위대한 역사를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 계산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신 적이 없습니다. 가장 적합한 때에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이 당한 시험은 이길 수 있습니다.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당신이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피할 길을 열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일으키시기도 하지만 물을 빼내시고 땅을 마르게도 하십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물러갑니다. 개인적인 위기를 만났을 때 끝이 없이 영원할 것 같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끝은 반드시 있습니다. 위기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고난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루신 후에는 물을 빼시기 시작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위기 속에 하나님께서 물을 빼시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위기가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이 민족이 겪는 모든 위기가 다 떠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서 바람을 일으켜 물을 뺀 두가지 예를 찾아보기 원합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바로의 군사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 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바람이 아닙니다. ‘특별한’ 바람이 홍해 위로 불기 시작하고 물을 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홍해에 길을 만들었습니다.

두번째, 마태복음 8장 24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중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겁이 나서 잠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내가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두려워 하십니까? 여러분만 망하거나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놀랍게도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람과 파도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오십 일 후에 감하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혔다’는 말은 ‘원 위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심판을 끝내실 무렵에 하나님께서는 원래 위치로 돌리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 큰 건강을 주실 것이며, 기업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큰 기업을 주실 것이고, 자녀들 때문에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자녀들 때문에 기쁨의 웃음을 갖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비는 그쳤습니다. 3절을 보면 물이 점점 물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홍수는 갑자기 왔지만 물이 빠질 때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할 때 갑자기 하시기도 하고 서서히 하시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조급해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천천히 가면 여러분도 천천히, 하나님이 빨리 가면 여러분도 빨리 가십시오. 이것이 최상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고 순종하십시오.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면 방주를 지으십시오. 내게 이해되고 내가 경험한 배를 지으려고 할 때 사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지으라고 하면 지어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복은 없습니다.

물이 천천히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천천히 빠지는 것이 구원의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예수는 오늘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삶은 평생 걸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지 못하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단계적으로 성숙시키고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칠월 곧 그 달 십 칠 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 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2월 17일, 홍수가 시작되어 7월 17일,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고 그때부터 물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라랏 산’은 원어로 보면 ‘아라랏의 산들’입니다. 아라랏은 이란, 터어키, 러시아 국경에 있는 큰 산 줄기입니다. 그 산들 중 한곳에 방주가 머물렀습니다. 시편 104편 4, 6, 8절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노아의 방주와 상관하여 나타납니다.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 갔나이다’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것을 과학적으로 기록했다면 책을 몇 십권 써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짧은 몇 구절 속에는 놀라운 영감이 있습니다. 그 속에 환상이 있고 놀라운 비밀들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면 마치 우리가 그 당시에 있는 것 같은, 홍수를 만난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중에는 천국에 가 본 사람은 없지만 천국에 갔다 온 것보다 더 확실하게 마음에 천국을 이루고 삽니다. 산들이 꺼지고 땅들은 솟아 올랐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은 히말라야, 알프스, 안데스 산맥들은 모두 젊은 산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산에서 물고기와 조개 등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아시아에는 섬들로 된 나라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높은 산이 꺼져 봉우리만 남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내륙지방에 물고기 화석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노아의 홍수란 역사적 사실만이 이것들의 설명을 가능케 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십시오. 과학으로 이것을 다 평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미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날이 10월 1일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홍수가 난지 7개월 13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노아도 마음은 조급했던 것 같습니다. 노아는 창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내 보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노아는 비둘기 한 마리를 내어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돌아다니다가 앉을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노아는 다시 일주일 후에 비둘기를 내어 보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놀랍게도 이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도 노아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싸인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물은 빠지고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노아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보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위기는 떠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온 세상은 물로 덮혀 있었습니다. 노아는 일주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갈 곳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쯤되면 보통사람들이라면 뚜껑을 열고 방주 밖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노아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비둘기를 보면서도 다시 기다렸습니다. 그는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마음대로 추측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기 어려운 방주 안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기다림’입니다. 기도하는대로 즉시 응답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면 ‘혹시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잇는 것은 아닐까?’,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기쁘고, 놀랍고,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현실입니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서 사는 일은 고통입니다. 구원은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은 평생이 걸리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마치 유토피아같은 생활을 꿈꿉니다. 여러분이 가진 환상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죽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천국에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는 질병이 있고, 고통이 있고, 자식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당한 고난을 빨리 끝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좀 더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고난을 좀 더 겪으라고 하십니다. 매일매일 싫어하는 사람과도 함께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믿지 않는 사람이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사람의 고난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지만 삶은 믿음으로 이루어 집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신앙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기다려야 하지만 하나님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물을 한꺼번에 뺄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물이 빠지는데 1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마십시오. 노아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들어가라고 말씀하셔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까마귀나 비둘기를 보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노아가 보낸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삶을 살 때에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탐색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다 해주시겠지’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육백 일 년 정월 곧 그 달 일 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겅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해가 바뀌었습니다. 물이 걷혔을 때에야 비로소 노아는 방주 뚜껑을 제치고 확인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노아는 방주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 월 이십 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우리가 보기에는 방주 밖으로 나와도 될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불평하지 마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십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재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만사형통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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