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나무의 길을 숨기신 하나님 (창 03:22-24)

첨부 1



오늘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다루시는 방법과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은혜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을 조건없이 베풀어 주시며 오랜 시간동안 말할 수 없는 인내의 과정을 거치고서라도 결국 우리를 구원해 내고야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가슴에 고통과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으로 대가를 치루었기 때문에 값진 것입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고통과 아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있는 분이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제한하고 고통을 겪으십니다.

죄를 지어 죽게 된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가지로 나눠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와 수치는 가려지지 않습니다. 가리면 가릴수록 더 보이고 감추면 감출수록 더 커지는 것이 죄입니다. 죄와 수치는 절대로 숨길 수 없습니다.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감추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허물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고발이고 비판입니다. 가족들의 허물을 들춰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녀의 수치를 남이 볼까봐 감추는 것과 같이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감춰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치를 가리워 주기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주셨습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에덴동산에 첫 죽음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물을 죽여 피를 흘린 후 가죽을 얻었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워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는 순간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위로가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죽옷을 입는 순간부터 ‘제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다는 놀라운 사실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허물과 실수를 덮어주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깨달아집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않거나 남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사랑표현은 생명나무를 숨긴데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보좌에 있었던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복된 나무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그 나무가 생명수의 강과 하늘의 보좌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나무가 아담이 죄를 짓고 난 후에 감추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숨긴 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죽음의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만일 죄가 씻겨지지 않고 용서되지 않은 채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다면 진짜 저주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채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죽어야 합니다. 죄와 함께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다시 살아나듯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지은 죄가 씻겨진 후에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때 영원히 사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 죄를 지은 채 영원히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원히 죄 지은 채로 살게 될까봐 급히 에덴동산을 폐쇄시키고 생명나무를 감추어야만 했습니다. 생명나무를 감추시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아담과 하와를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사랑이 숨어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산에 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이 두 나무는 아주 특별한 나무였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탄과,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게 되면 죄를 알게 되고 사탄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썩은 음식을 먹게 되면 설사를 하게 되고 바이러스균에 오염이 되어서 무서운 전염병이 생기기 때문에 먹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가 전염병에 걸리면 그 균이 전염되어 가족을 죽이기 때문에 자녀를 그 집에서 내보냅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병원에 보내어 그 병이 다 나을 때까지 병원에 격리수용했다가 모두 나은 후에 집으로 데려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모든 것에 부패와 저주와 죽음이 오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생명나무를 숨기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먹게되면 죄에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급히 생명나무를 숨긴 것입니다.

생명나무를 숨기는 유일한 방법은 에덴동산을 폐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에덴동산을 폐쇄시키시고 기가막힌 심정을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낸 것은 아담과 하와를 저주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 고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마치 집안에서 아이를 데리고 살지 못하고 병원에 보내어 격리수용시켜서 치료받게 하는 것은 그 아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살리려는 부모의 눈물어린 사랑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멸망과 진노를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설명이 22절 중간에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2절에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은 잘못 보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담은 아무리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도 인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없앨 수도 있고 사탄을 심판하고 내쫓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를 다룰 능력은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죄를 경험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죄를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탄에게 빠져 버렸고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저주와 멸망뿐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복된 동산이며 영생하는 동산입니다. 그곳은 죄가 없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은 노동하지 않아도 계절마다 먹을 것이 있고, 물을 구하기 위하여 지하수를 파지 않아도 됩니다. 그곳은 기쁨의 노동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축출하셨고 축출당한 아담과 하와가 간 곳이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후에 이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병도, 죽음도, 저주도, 가시나무도, 엉겅퀴도 없는 복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이 세상은 추위와 더위가 있고, 지진이 있고, 이상기후가 있고, 싸움과 전쟁이 있고, 생존경쟁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으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쫓겨난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일컬어 ‘공중권세 잡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요, 저주와 죽음이 있는 곳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7-80년만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적당한 때에 죽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후 이 세상은 저주를 받았다고 했는데 동물과 식물의 세계는 어떨까요? 가끔 ‘동물의 세계’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거기에는 동물들이 너무나 예쁘고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야말로 생존경쟁이 치열한 곳입니다. 적자생존과 먹이사슬이 존재하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하여 사는 곳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환경오염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원시시대의 환경은 오염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처음부터 죄입니다. 죄가 진화되어서 오늘과 같은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과 동일한 불치병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병과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박물관에 있는 많은 유물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애굽의 화장술과 미용술은 현대인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문화와 학문이 있었습니다. 원시인들의 고독과 허무는 현대인들과 동일했습니다. 죄는 어느 곳에 가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죄의 현상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모든 사회현상은 아담이 살던 시대나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도 동일하게 있었던 일입니다. 아담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 가시덩쿨과 엉겅퀴를 내는 땅, 하루 종일 땀을 흘려야 하는 땅을 보고 말할 수 없는 절망과 좌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향한 그리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폐쇄되고 생명나무는 감추어 졌기 때문에 돌아갈수 없었습니다. 아담은 그 후로부터 눈물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보호하기 위해그룹들을 보내어 지키셨습니다. 이 그룹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 보좌에 있는 천사들입니다. 네 날개가 있는 천사들이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다시 불러 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없애야 했습니다. 병이 완전히 나은 후에야 사랑하는 자식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근본적으로 수술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과정이 몇천년걸리고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가죽옷을 지어 입힌 후에 에덴동산을 쫓아내고 생명나무를 감추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살인을 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세상에 죄가 관영해지자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홍수에 완전히 쓸어버리지 않고 노아의 여덟식구를 살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저주와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너를 구원하고 회복시켜 다시 에덴동산으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선택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어서 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믿음의 사람으로, 복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이삭에게서 야곱을 낳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산 자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 야곱때부터 한 민족을 만드십니다. 그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4백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고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킵니다. 그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동안 훈련을 시키십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십계명과 더불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인 ‘율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성막을 통하여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 후 한 국가를 택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는 말씀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고 아담의 원죄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시야를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죽옷부터 무지개로, 아브라함에게서 모세에게로, 다윗에게로 나타납니다. 먼 훗날 한 여인의 몸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못박혀 죽으심은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한 피흘림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피를 흘렸거나 짐승이 피를 흘렸다고 해서 인간의 원죄가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피흘려야만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동물의 피를 흘리게 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의 피를, 그 다음에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림으로 아담이 지은 원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5장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만이 아담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몸속에 아담때부터 흐르고 있던 원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는 숨겨졌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기는 그들에게 낙원의 감추었던 그 생명나무의 과실을 다시 먹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아담의 원죄가 근본적으로 없어지고 예수님이 주시는 과실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가 다시 발견되었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에덴동산이 회복된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천국이 회복되고 에덴동산이 회복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될 것이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놀라운 영적경험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 땅이 회복될 것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입니다. 저는 여러분안에 이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